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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초등학교 홰나무는 2만2,0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는 동안에도 굳건히 교정을 지키며 유구한 세월을 이겨내고 있다.


 

 

'회화나무'란 이름보다는 '홰나무'란 이름이 촌스럽게 느껴지는 듯도 하지만, 우리 고유의 정서를 물씬 풍기고 있는 정겨운 이름이다. 그래서이리라, 중국이 원산지이지만, 우리 겨레의 민족성과 정서를 상징하는 나무로 알려져 있다. 일제는 우리 나라를 강제로 삼킨 뒤에 홰나무를 무수히 베어냈다고 한다. 대표적인 곳이 서울 인사동 거리였다. 온통 홰나무 길이었는데, 일제가 모두 잘라냈다고 한다. 그래도 용케 나라 안 곳곳에 살아 남은 노거수 홰나무가 그 아름다움과 웅숭깊음을 보이며 있다. 중국에서 아주 오래 전에 건너온 나무인 만큼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명문학교에는 노거수 홰나무가 한 그루씩은 자라곤 했다. 오래 된 나무인 점도 있지만, 학자의 나무, 즉 학자수(學者樹)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었다. 서원이나 향교에 홰나무를 심은 이유다.

 

우리 나라 유학의 본산 성균관 명륜당 앞에도 노거수 홰나무가 자라고 있다. 울산의 대표 초등학교로 이름을 떨쳐 온 울산초등학교에도 300년생 홰나무가 그 푸름을 보이며 있다.
 일제가 우리 나라를 강제로 집어삼킨 1910년 전후에 그 곳에 있었던 태화루와 홰나무는 울산의 상징이었다. 울산초등학교는 본래 울산도호부의 객사(客舍)였다. 객사는 임금의 궐패를 모시고 연회(宴會)의 장소로도, 타지에서 일시적으로 다니러 온 관리들의 숙박기능도 지녔다.
 학성관(鶴城館)이라 불린 본관과 부속건물 동·서청(東·西廳)과 정문 제승문(制勝門)과 그 앞의 문루를 겸한 종루였던 태화루(太和樓)가 있었다. 태화루 앞 남북축(軸)과 구 상업은행 좌우의 동서축에 울산의 도로가 나있었다. 울산의 중심 가로(街路)였다. 현재 원도심의 중심도로인 학성로는 한참 뒤 일제강점기에 개설된 것이다.
 울산초등학교는 학성관 자리에서 일제가 강제로 나라를 삼키기 세 해 전 1907년 4월 10일에 울산공립보통학교란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그 무렵에 찍은 사진을 보면 구내 동편 앞에 큰 키의 홰나무가 상징처럼 올연히 서있는 모습이 눈길을 끈다. 학교의 입구에는 2층짜리 태화루가 수문장처럼 버티고 있었다. 태화루의 윗층은 토론장으로도, 도서관으로도 쓰였다. 울산 문화의 수원지로서의 역할을 했다.
 나라의 운명이 경각에 달렸던 때에 개교한 울산공립보통학교는 일제강점기인 1938년 4월 1일 울산공립심상소학교로, 41년 4월 1일에 태화공립보통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광복을 훌쩍 넘긴 55년 4월 1일에 울산국민학교로, 96년 3월 1일에 지금의 울산초등학교란 이름을 갖게 됐다.
 그동안 2만2천여명의 졸업생을 내보냈다. 오랜 기간 울산의 대표 학교로 군림해왔지만, 원도심의 쇠락과 함께 폐교 위기로까지 내몰리고 있다. 한창 때에는 수천명의 학생이 다녔지만, 이제는 1-6학년까지 10개 반에 200명이 채 되지 않는 학생이 다니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그 영욕을 지켜본 홰나무는 그 푸른 기상을 잃지 않고 있다.
 우리 선조들은 홰나무를 최고의 길상목(吉祥木)으로 꼽았다. 학자수로 꼽은 외에도 홰나무 세 그루만 있으면 대길(大吉)한 일만 생긴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잡귀신도 범접을 못하고 좋은 기운만 모여든다고 했다. 그래서 명문가의 정원에 심어졌다. 후손 중에서 유명한 학자가 태어난다고 믿었다. 한방에서는 고혈압이라든가 지혈 등에 쓰이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소중한 나무로 쳤다.
 그러므로 매우 귀하고 신성하게 여겨 함부로 아무 곳에나 심지 못하게 했다. 평민들은 심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농민들은 홰나무를 신목(神木)으로 쳤다. 꽃이 필 때 위에서 먼저 피면 그해 농사가 풍년이고, 아래에서 먼저 피면 흉년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팝나무를 풍년농사를 가늠하는 신목으로 꼽은 것과 같다.
 폭염주의보가 연일 내려진 지난 주말 울산초등학교를 찾았다. 여름방학에 들어간 교정엔 적막감이 감돌았다. 매미소리만 간간히 무거운 적막을 깨뜨리고 있었다.
 땡볕이 교정의 모든 것을 불태울 듯 빗발을 곤두세우고 내리고 있었다. 교정의 나무와 화초들의 축 처진 모습이 몹시 지쳐 있는 듯 했다.
 정문에서 뒤돌아서서 원도심 시가지를 내려다 봤다. 눈 아래 길은 시계탑 네거리까지 곧게 뻗은 뒤에 한 차례 꺾여 울산교까지 이어졌다.
시계탑의 원형 돔만 시야에 들어올 뿐, 그 곳에서 울산교까지 뻗은 길은 보이지 않는다. 숨이 턱 막힌다. 태화강변에 들어선 세 채의 초고층 건물이 시야를 온통 가리고 섰기 때문이다. 도시의 괴물에 다름 아니다. 원도심의 부활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발길을 옮겨 강당으로 향한다. 강당 곁에 홰나무가 자리잡고 있다. 강당의 뼈대는 거의 바뀌지 않았다. 지붕과 벽면 등 겉모습만 탈색되면 페인트칠을 되풀이 했으리라. 일제가 1940년 5월에 운동장을 넓히고 강당을 짓는다는 명목으로 태화루를 일반에 매각한 뒤 허물었다는 옛 자료를 보면 강당의 수명은 아마 70년은 됐으리.
 그 강당은 갖가지 용도로 쓰였다. 60-70년대에는 징병검사장으로도 쓰였다. 당시 군대를 다녀온 세대들에게는 기억이 새로울 것이다. 징병검사날이면 울산 각지에서 모인 장정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요즘처럼 교통편이 좋지 않은 때여서 검사를 받기 위해 미리 나온 장정들이 근처 여관이나 여인숙에 머무르곤 했다. 큰 볼거리였다.
 홰나무는 강당 출입구에 가까운 서남쪽에 자리잡고 있다. 둥글게 시멘트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철재로 만들어진 울타리가 둘러싸고 있다. 직경은 8m 가량. 울타리 안에 서쪽을 향해 중구청이 만든 노거수(老巨樹)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안내판에는 '지정번호 6번. 지정일자 2000년 7월4일. 수령 약 300년. 수고 18m. 나무둘레 3.4m'라고 적혀 있다.
 이 홰나무는 지난 80년대 초에 당시 기초단체인 울산시가 보호수로 지정했다가, 보호수 지정을 철회했다. 어찌 된 사연인지, 또 언제쯤 해제됐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다 중구청이 지난 2000년 7월에 노거수로 지정했을 뿐, 비보호수이다.
울산생명의숲이 2003년 11월에 펴낸 '울산의 노거수' 책에는 이 홰나무의 생육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추정수령 150-200년. 수고 15.2m. 수관폭 19.4m. 가슴높이 둘레 4.1m. 뿌리부분 둘레 3.22m. 용도는 정원수'라고 밝히고 있다. 중구청이 만든 노거수 안내판에 적힌 내용과는 크게 다르다. 바로잡아야 할 대목이다.
 홰나무가 있는 곳의 반대편 운동장 서북쪽에 바라보면 가지와 잎은 북동쪽에서부터 치켜 올라가 남쪽과 남동쪽으로 솟은 모습이다. 밑둥치가 땅에서 곧게 올라가다 2.5m 높이에서 북동쪽을 향해 가느다란 줄기 한 개를 내질렀다. 그리고 조금 남쪽으로 꺾여 큰 줄기 두 개를 내놓았다.
 큰 줄기 두 개 가운데 곧게 뻗은 것은 1.5m 지점에서 세 개의 작은 줄기를 뻗었다. 다른 것은 남쪽으로 계속 꺾이다가 작은 가지를 사방으로 내놓았다. 위쪽에는 군데군데 가지가 부러지고 말라버린 것도 있다. 위쪽 가지와 잎은 강당 2층 지붕 귀퉁이를 뒤덮고 있다. 그 중에는 더위 탓인지 잎이 시든  것도 보인다. 아래쪽에도 말라버린 잔 가지가 상당수에 달한다.
 보호울타리 안쪽에도 잎이 떨어져 수북히 쌓여 있다. 근래의 무더위 탓이라 해도 한창 짙푸른 잎이 무성해야 할 때에 시들고, 그리고 떨어지는 것은 나무 생육에 적신호가 켜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학교 중앙화단에는 대형 자연석에 '여기는 푸른 꿈을 이룬 인재의 산실/백년을 이어 영원 무궁 빛나리라'란 글이 새겨진 개교 100주년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2007년 4월10일 울산초등학교의 100주년 기념일에 세운 것이다.
 기념비 뒤쪽에는 기념식수도 해놓았다. 나무는 다름 아닌 학교의 상징 노거수 홰나무와 똑 같은 홰나무. 키라야 이제 4m 정도에, 굵기 또한 30㎝에 불과한 어린 나무다.
 2m쯤 되는 아랫도리는 잎이 하나도 달리지 않은 줄기로 그대로이고, 윗부분 수관은 원추형을 이루고 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함께 웃고 울고 함께 뛰노는 어린이들처럼 무럭무럭 커나가 언젠가는 아름드리 노거수를 이루리라.
 그러고 보니까 올해 103년 역사의 울산초등학교의 교목(校木)이 우리 정신문화의 상징이었던 '홰나무'가 아니던가. 노거수 홰나무를 길이 보호해야 하는 당위성이 바로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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