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울산시 동구의 남목(南牧)은 마을 이름이 조선 때에 말(馬)을 기르던 울산목장에서 비롯됐다.
 울산은 나라의 동단(東端)에 위치한 관계로 국방의 요충지로서의 중요성이 매우 높았다. 왜구의 침략을 방어하는 최전선으로서 태종 때 병마절도사영, 즉 병영이 설치됐다. 세조 때에는 수군절도사영, 수영까지 설치됐으나, 나중에는 부산으로 옮겨졌다.
 그런 연유로 해서 국방에 필수적인 말을 사육하는 목장이 울산에 생겼다. '경상도속찬지리지' 울산군 편에 기록이 처음 나온다. '군 동쪽 적진리(赤津里)에 목장이 있으니, 곧 방어진 목장이다. 둘레가 47리나 되고, 말 360필을 들여와 방목했다'고 적혀 있다. 영조 때에 편찬된 학성지(鶴城誌)에는 효종 때에 길이 3천626보(步)의 마성(馬城)을 쌓았다고 기록돼 있다.
 울산목장에 대해 온전하게 기록한 최초의 책은 고종 12년(1871년)에 나온 '영남읍지'다. '울산목장목지(蔚山牧場牧誌)'가 실려 있다. 관리를 책임지고 있는 감목관(監牧官)의 집무처인 관기(官基)는 남옥(南玉)에 있었다. 지금의 남목초등학교 자리다. 옛 이름은 남옥(藍玉)이었다. 목장 이름은 그래서 넓은 뜻에서는 울산목장이지만, 좁은 뜻에서는 남옥목장이었다. 이 남옥에 있는 목장에서 오늘날의 마을 이름 '남목(南牧)'이 생겨난 것이다.
 목장에 소속된 마을 가운데 남옥은 관기(官基)의 서쪽에 있었다. 울산의 병영과는 30리 거리였다. 목장의 동쪽 경계인 주전은 10리 거리에 있었다. 서쪽 경계인 염포와 신전은 8리와 10리에 있었다. 남쪽으로는 방어진 20리, 일산진과 전하 15리, 미포와 대변 5리, 목장리와 화잠이 20리에 있었다. 북쪽으로는 병영이 30리에 있었다. 목장리와 화잠이 중심부였다. 조정의 사복시(司僕寺)에서 점마사(點馬使)가 내려와 말을 검열하던 점마청(點馬廳) 등이 있었다. 특이하게도 마신(馬神)에게 기도를 올리는 당사(堂祀)와 마당(馬堂)과 마단(馬壇)이 있었는데, 그래서 공식인원으로 3명의 무녀(巫女)를 두고 있었다.
 울산목장에서 사육한 말은 조선 전기에는 360마리였으나 후기에는 훨씬 늘었다. 옛 기록을 보면 시기에 따라 편차가 심했는데, 최저 490마리에서 최고 1450마리까지 됐다고 한다. 울산목장에서는 1년간 의무적으로 증식해야 할 말의 숫자가 정해져 있어서 사육에 각별한 신경을 썼다. 또 해마다 8월에 사복시로부터 분양마(分養馬) 3마리를 받고는 다음해 4월에 받은 숫자대로 바쳤다고 한다.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