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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기의 우리 영화가 두 가지 호재를 만나 재도약을 노린다는 보도가 잇따라 나오고 있다. 몇 년 전만해도 꾀 투자를 한 충무로 영화 한편이 개봉하면 개봉 그 자체가 화제였다. 연일 관객 기록을 갈아치운 소식과 한류에 새로운 아이템이 가미된 경제적 파급효과까지 들뜬 보도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우리 영화의 현주소가 낯설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같은 경제논리가 아닌 작품성과 흥행논리를 놓고 영화계 안팎이 시끌벅적하다니 재미있는 현상이다.
 올 여름 우리 영화시장을 흥분시키고 있는 두 영화는 몇 가지 의미 있는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개봉 4일 만에 2백만 관객을 돌파한 '디워'는 영구시리즈로 출발한 심형래의 영화도전기가 일단 성공했다는 점에서 눈여겨볼 만하다. 또 이미 30~40대 이후의 중장년층을 스크린으로 발길을 돌리게 한 '화려한 휴가'는 우리와 가장 가까운 시기의 현대사를 재구성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영화는 관객과 소통하는 영상매체이기에 소통의 구조가 늘 흥행의 열쇠가 되어 왔다. 같은 시기 두 작품이 우리영화의 흥행몰이에 나섰지만 유독 '디워'만 시비의 정점에 서 있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티라노의 발톱'으로 시작한 심형래의 '용 집착증'은 용가리 참패 이후 한동안 사람들의 기억에 묻혀 있었다. 그런 그가 지난해부터 새로운 '용 영화'로 미국시장을 겨냥한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대체로 사람들은 "또 용가리 수준이냐"는 식의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심형래가 종전에 보여준 용가리류의 한국판 CG는 퍼즐조각의 몇군데가 빠진 게임같이 어설픈 구석이 있었다. 물론 이번에 개봉한 '디워'도 관객들 대부분이 주인공격이 이무기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장면처리에서 CG 수준이 어색했다는 평이 있지만 과거처럼 전체를 폄하하는 평이 없다는 점이 다르다.
 문제는 '디워'의 흥행몰이와 함께 시작된 영화계의 충무로와 반충무로 정서, 일부 젊은 영화인의 비난성 영화평과 그에 반대하는 사이버 논쟁이다. 물론 우리 영화계는 엄연히 충무로와 반충무로 정서가 존재하고 있다. 이는 비단 충무로만의 현상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사회구성체들의 집단이기주의이기도 하다. 심형래야말로 충무로의 이단아였지만 절치부심의 세월동안  이무기가 용이 되기 위해 온갖 시련을 이겨낸 것처럼 반충무로 정서를 이겨냈다. 하지만 일부 젊은 영화인이 심형래에게 보내는 비하성 발언은 우리 영화산업의 현주소를 보는 것 같아 차라리 안타까운 마음이 앞선다.
 쿼어영화로 제법 유명세를 탄 한 젊은 감독은 '디워'의 흥행이 시작되자 " '디 워'는 영화가 아니라 70년대 청계천에서 마침내 조립에 성공한 미국 토스터기 모방품이다" 며 흥행에 동참한 관객들은 영화를 민족주의적 프로파겐다로 보는 것 같다는 쓴소리를 뱉아냈다.
 심형래를 여의주를 얻어 용이 된 이무기로 보든 용이 되지못한 괴물로 보든 그 판단은 다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영화의 품질을 따지는 평론의 화살이 인간 심형래의 오락영화와 소통하려는 관객의 취향까지 싸잡아 비난하는 점이다. 비판은 발전을 위해 좋은 일이다. 하지만 본질을 벗어난 비판은 비난이거나 저질 주절거림에 지나지 않는다. '디워'를 본 200만의 관객과 앞으로 영화관을 찾을 관객들이 정말 자신의 영화보기를 민족주의 선전활동 쯤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의아스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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