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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풍이 동쪽으로 자리를 바꾸니/창가의 어린 매화 봉오리짓네/이 한해도 저물어 봄이 멀지 않은데/사람은 어이 이리 회춘을 못하나.> '세모(歲暮)'란 제목의 이 시(詩)는 언양 출신 여류시인 구소(九簫) 이호경(李頀卿, 1894-1991)이 지은 한시를 석정(石汀) 최두출(崔斗出)이 번역한 것이다. 1980년 봄에 최두출이 이호경의 한시를 국역한 뒤 펴낸 시집 '봉선화(鳳仙花)'의 맨 처음에 나오는 작품이다.
 이호경은 근대 울산지역의 한시를 이야기할 때에는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다. 그의 생애는 2001년에 나온 언양읍지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생몰연도는 1892-1980년대 중반. 일제시대 언양의 명기(名妓)이며 여류시인. 본관은 경주(慶州). 1892년 언양읍(당시 상북면) 서부리 41번지에서 이영회(李榮會)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어려서 송옥(松屋) 오병선(吳昞善)의 문하에서 작시법을 배웠고, 재색이 뛰어났다. 초명은 봉선(鳳仙)이고 뒤에 호경으로 고쳤다. 구소는 시호(詩號). 최두출이 국역한 시집 '봉선화(1980)'가 있다. 작천정에 '작천정 현판의 운(酌川亭板韻)'이란 시를 적은 편액이 걸려 있고, 그 앞 냇가에 그의 시를 새긴 시암(詩巖)이 있다.
 그러나 시집 봉선화에 실린 시인 모윤숙(毛允淑, 1909-1990)과 김택천(金澤天, 1895-1987)의 글을 살펴보면 이호경은 1894년에 태어나 1991년에 타계한 것을 확인할 수가 있다. 이호경은 울산의 거부(巨富)이자 선각자 추전(秋田) 김홍조(金弘祚, 1868-1922)의 소실로 들어가 15년간을 함께 살다가 김홍조가 사망하자 1년 뒤에 거창의 정씨 집안으로 재가했다고 한다.
 시집 봉선화에는 이호경이 지은 62수의 한시가 국역과 함께 실려 있다. 책 머리에는 작천정 현판 글씨를 쓴 김성근(金聲根)과 정만조(鄭萬朝), 스승 오병선이 1917년에 쓴 글이 실려 있다. 이호경이 오래 전에 한시집을 내려고 준비해왔음을 알 수 있다. 또 박순천(朴順天)과 모윤숙, 김홍조의 아들인 김택천의 글이 실려 있고, 이호경과 국역자인 최두출의 글도 수록돼 있다.
 작천정에 편액으로 내걸린 '작천정 현판의 운(韻)'이란 시는 <천년 전에 난정(蘭亭)이 있은 뒤/작천정이 으뜸 가는 다락일세./저토록 흰 돌이 또 있을텐가/그 사이로 맑은 물이 흘러 가네./쏟아지는 달빛은 눈이 번득이는 듯 하고/여름 하늘엔 가을기운도 서렸으니/얼마간의 풍경이나마 어찌 그려내랴/붓을 잡으니 근심만 일어나네.> 시집 봉선화의 96쪽에도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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