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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천년왕국 경주에 들어서면 왠지 모르는 편안함이 다가온다. 이는 아마도 천년 도읍지였다는 경륜에서 오지 않나 싶다. 지난 1,000년 세월 동안 막강한 권력과 화려함, 적막감 등을 맛본 도시가 아닌가. 천년의 흥망성쇠를 모두 겪어본 뒤에 도달하는 초연함과 담담한 기운이 도시 전체에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신라의 연회장소 월지궁 임해전
망국후 폐허된 뒤 안압지로 불려
넋잃게 만드는 '직선-곡선 어울림' 
어둠 속 단청 밝히는 조명 장관연출

특히 한반도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뤄낸 '통일신라'는 신라·백제·고구려로 나눠져 있던 삼국을 하나로 통일함으로써, 고려와 조선을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 문화의 원형질을 확대 재생산 시킨 원동력을 제공했다.
 1992년 56왕이 이어져 왔던 천년의 왕국 신라는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우고 '일통삼한'(一統三韓)이라는 민족형성의 위대한 업적을 남기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천년의 세월과 무게가 남겨놓은 유산은 여전히 이 땅을 지키고 있다.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천년왕국을 건설했던 신라는 천년동안 수도를 경주에서 단 한번도 옮기지 않았다. 그래서 경주에는 신라천년의 찬란한 불교 유적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경주가 신라인들이 부처님 세계를 재현한 '불국토'라고 불리우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 불국토의 중심에 자리잡은 경주시 인왕동 사적 제18호 '안압지(雁鴨池)'를 찾아가보았다.

 사실 안압지는 이름부터 잘못되어 있다. '삼국사기' 살펴보면 통일 직후인 문무왕 14년(674년)에 "궁 안에 못을 파서 산을 만들고 온갖 화초와 진귀한 새, 짐승을 길렀다"고 했다. 또 효소왕 6년(696년)과 혜공왕 5년(769년)에는 "군신들을 임해전(臨海殿)으로 모아 큰 잔치를 베풀었다"고 씌여있다. 하지만 1980년 안압지를 발굴해보니 토기 쪽에서 월지(月池)라는 명문(銘文)이 여러 점 나왔다. 최치원이 쓴 봉암사 지증대사 비문에도 헌강왕의 부름을 받아 월지궁(月池宮)에 당도하니 "달그림자가 연못 복판에 단정히 임(臨)하였다"고 했다. 이를 종합해 보면 월지궁 임해전이 분명하다.

 안압지라는 이름은 신라가 망하고 폐허가 된 뒤 연못가로 기러기가 날아드는 정경을 보면서 시인 묵객들이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본격적인 가을이 시작돼 제법 쌀쌀하다. 어둑어둑해지는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한 늦저녁이라, 고요하고 단아한 안압지의 모습을 느낄수 있었다.
 양옆으로 자리잡은 잔디밭 사이의 흙길을 따라 안압지 월지궁 임해전의 모습이 다가온다.

 임해전 내부에는 안압지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출토된 수많은 문화재를 전시해 놓고 있다. 신라시대의 목선부터 장신구류까지 옛 신라시대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다. 또 인근 경주박물관에는 아예 안압지관을 건립해, 따로 보관 전시하고 있을 정도니 한때 이곳이 신라시대 귀족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장소였다는 것을 짐작할수 있다.
 월지궁 임해전은 사방 190m, 약 4,500평으로 한쪽은 반듯한 석축에 전각을 세우고, 다른쪽은 자연석으로 절묘한 곡선을 이루었다. 그 직선과 곡선의 환상적인 어울림이 이 정원의 미학이다.
 안압지를 한바퀴 돌아나오는 동안, 두눈에는 불빛에 비춰지는 월지궁 임해전과 아직 잎이 달린 상록수 사이에 겹겹이 그 농도를 달리한 장엄한 하늘이 펼쳐진다.

 역시나 안압지의 압권은 연못 물에 반사되는 임해전(臨海殿)의 단청 모습이다. 날이 어두워지자, 안압지 월지궁 임해전부터 연못 주위의 나무들 곳곳에 불빛이 드리워진다. 불타는 듯한 붉은색 조명과 화려한 푸른색 조명 등이 한데 어우러져 그야말로 장관을 연출한다.
 특히 멀찌감치 떨어져 연못에 비춰진 단청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달맞이를 하러 거니는 신라시대의 귀족이 된듯한 기분이다. 실제 임해전의 단청보다도 밤에 불빛을 받아 출렁거리는 연못 물에 반사되는 그 광경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물에 반사된 임해전의 모습은 우리들의 존재 자체가 결국 물에 비추이는 그림자, 즉 몽환포영(夢幻泡影)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었다.

 잔잔한 연못에 드리워지는 안압지의 모습이 실제보다 더 선명한 풍경이기에 두고두고 보고싶은 욕구가 생겨난다. 연못에 바람 한점없이 물결도 일지않는 안압지의 모습이라, 더욱 그러하다. 게다가 연못을 장식하고 있는 수련들이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킨다.
 이처럼 넋을 잃고 안압지의 풍경을 감상하고 있으니, 하나둘씩 연인들이 데이트를 즐기러 안압지를 찾아온다. 이들도 하늘에 걸린 달빛이 비춰지는 안압지의 모습에 흠뻑 취해, 카메라에 안압지를 담으려고 분주하다.

 화려한 조명을 설치해 밤이면 멋진 야경을 즐길 수 있는 안압지는 월지궁 임해전이 단연 으뜸이지만, 연못 가운데 크고 작은 3개의 섬도 이에 못지않게 장관을 연출한다. 이 연못 주위를 산책하면 계곡과 호수와 누정(樓亭)의 멋을 모두 즐길 수 있어 반드시 추천하고 싶은 산책코스이다.
 어느덧 안압지의 탐방이 끝날무렵, 맑은 늦가을 밤하늘에 풋풋한 별들이 총총히 수놓아져 있었다. 이윽고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가 안압지의 모습을 더욱 단아하게 만든다. 유구한 역사와 전설을 가진 천년의 도시 경주에서의 '시간여행'이 가슴깊이 남아있어서 일까? 못내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글·사진=서승원기자 usss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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