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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오는 15일 자국의 종전기념일에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지 않기로 한데 이어 각료 16명도 참배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일본 내각 각료들이 종전기념일을 맞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지 않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전후 집권 내각 가운데 가장 우익성향이 강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아베 내각의 이번 결정은 그래서 더욱 뉴스거리가 된다.
 아베 내각의 이 같은 결정을 두고 우익의 후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일본의 우익은 종종 곰팡이에 비유된다. 햇살이 강렬하면 곰팡이는 음지로 기어들기 마련이듯 아베 내각도 음습한 시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의 과거사에 대한 태도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소다. 메이지유신 직후인 1869년 일왕에 의해 '호국의 신'들에 대한 제사 지내기 위해 건립된 야스쿠니는 다른 신사와 차별성을 가졌다.
 특히 2차대전 당시에는 전몰자를 호국의 영령으로 제사하고, 여기에 일왕의 참배라는 특별한 대우를 해줌으로써 일본인에게 왕의 신격화를 고양하는 역할을 했다. 자신들의 왕을 위해 목숨을 바친 영혼은 출신이나 과거사를 묻지 않고 신격화 하는 야스쿠니는 말 그대로 일반인이 신으로 둔갑하는 변신의 통로였다. 2차대전 당시 일본의 젊은이들은 '야스쿠니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전쟁터로 떠났을 만큼 모든 가치의 기준을 왕에 대한 충성도로 정의했고 그것이 전쟁이라는 광란의 시대와 결합해 왕을 위해 죽는 것이 영광이라는 새로운 도덕관을 만들었다.
 2차대전의 A급 전범인 히로히토 일왕은 독일이 히틀러와 달리 비명횡사라는 몰락의 길을 걷지 않았다. 그는 패전과 함께 신격화된 지위가 인간으로 내려앉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황실의 권위까지 빼앗기지 않았다. 명예를 목숨보다 귀하게 여긴 사무라이 정신과 그 추종자들이 미 군정의 어디를 핥아주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미국은 불행히도 히로히토를 단죄하지 못했다.
 하지만 히로히토는 전후 일본 우익이 끊임없이 요구한 도조 히데끼 등 A급 전범의 야스쿠니 합사는 끝까지 반대했다. 일본 내각이 1978년 도조를 비롯한 A급 전범 14명의 위패를 비밀리에 합사하자 히로히토는 해마다 계속해온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당시 일본의 우익은 "A급 전범은 연합국이 규정한 것일 뿐, 일본 국내법상으로는 범죄자가 아니다"라고 주장했지만 히로히토는 "전범의 합사로 신사의 성격이 변하고 주변국과의 관계에 화근이 될 것"이라며 경고했다.
 히로히토의 이같은 경고는 이미 현실화 됐다. 한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한 일본과의 과거사 논쟁은 역사학의 논쟁 수준이 아니라 외교의 주요쟁점이다. 문제가 될 때마다 일본은 곰팡이 같은 생존법칙으로 위기를 관리해 왔다. 일본의 우익들이 주장하듯 주변국에서 자신들의 조상을 추모하는 공간을 만들어 참배를 하는 데 왜 간섭이냐는 식의 논리는 막가자는 식이다. 본질보다 포장에 열중하는 일본식 외향성에 별로 관심을 갖고 싶진 않지만 야스쿠니에는 지금도 엄연히 한국인과 대만인 전몰자 4만여 명의 위패가 있다. 대만정부나 우리 유족들이 끊임없이 합사취소를 요구했지만 안하무인격인 일본은 주변국에게 '우리의 문제'라며 버티기에만 열중하고 있다. 다만 주변국의 햇살이 강렬하고 자국의 사정이 여의치 않을 때 참배취소라는 외교적 꼬리치기로 잠시 수그릴 뿐이다. 이 우익의 곰팡이는 주변사정이 변하는 순간 역사의 음지로 파고들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편집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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