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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에 근대적인 의미의 체육활동이 시작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초반이었다. 울산의 근대체육을 알려면 당연히 우리 나라의 체육활동을 더듬어 보는 것이 순서다.

 우리 나라의 체육은 1895년 2월 2일에 고종(高宗)이 국민에게 내린 교육입국의 조서(詔書)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조서에서 체육은 '체양(體養)'이라는 용어로서 교육의 영역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근대체육은 1903년 10월 31일 황성(서울)기독청년회의 창립으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물론 그 전에도 검술과 창술, 기마술, 경마, 석전, 택견, 축국, 씨름, 수박치기 등 우리 고유의 운동(체육활동)이 있었으나 근대적인 의미의 체육경기인 야구와 농구, 축구, 탁구, 체조 등이 도입된 것은 기독청년회가 만들어진 1903년 이후다.

 우리 나라의 근대스포츠는 공식적으로 1920년 7월 13일 서울에서 조선체육회가 창립되면서 비롯된다.
 그 영향으로 1930년경 경상남도체육회가 창립되고, 당시 경남도 아래 울산군으로 편제돼 있던 울산의 체육도 비로소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하지만 울산의 체육활동은 그보다 앞선 1923년경부터 청년들이 축구와 정구의 보급에 나서면서부터이다. 그와 함께 동호인들이 1923년부터 씨름과 궁도대회를 열기 시작했다. 그런 경기대회를 통해서 일제의 학정에 대한 울분을 발산하고 마을간에 친목을 다져나갔다.

 그 무렵 축구와 정구를 보급하고, 대회를 개최한 것은 울산 불교소년단을 이끌던 박병호와 손정수, 김재문, 장정식, 오동택, 권연줄, 김정쇠씨 등이었다. 그들은 사재를 털어 울산체육의 진흥에 힘썼다. 울산 체육의 선각자들로서 그들을 길이 기억해야만 한다.

 당시 축구공을 사면 누더기가 되도록 썼다고 한다. 헤어지면 꿰매고 기워서 썼는가하면, 속에 들어 있는 튜브가 못쓰게 되면 짚과 수세미로 채워 사용했다고 한다. 마땅한 운동장도 없어 논이나 빈터에서 경기를 했다. 또 정구의 경우 라켓이 없어서 얇은 판자를 대용품으로 썼다고 한다.

 울산의 각 읍면에 축구와 정구 등이 널리 보급되고 대회도 열리면서 일반의 관심은 날로 높아만 갔다. 체육인구 또한 늘어나기 시작했다.

 1930년대 초반부터는 이웃 경주 등지로 원정을 다녔다. 3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경기력이 더욱 향상되자 동래와 대구에까지 원정을 다니면서 울산 체육의 뛰어난 실력을 다른 지역에도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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