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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의 유학은 우리 나라에 유학이 도입된 고려시대에는 기록이 없어서 그 상황을 확인할 수가 없다. 더욱이 신라 때부터 왜구의 침입에 노출돼 있어서 무(武)를 숭상하는 분위기가 무척 강한데다 고려에 들어오면서부터는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극변(極邊)지역이었기 때문에 문풍(文風)이 제대로 피어나기가 힘들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다른 지역에서 울산에 온 문인들의 시문(詩文)이 전해지고 있다. 고려 명종 때의 문인으로, 생몰연도가 알려지지 않고 있는 김극기(金克己)의 '태화루시서(太和樓詩序)'라든가 고려 후기에 중앙요직에서 울주군수로 부임해 온 정포(1309-1345)의 '울주팔경(蔚州八景)' 시와 이곡(李穀, 1298-1351)의 역시 '울주팔경' 시가 남아 있다. 또 정몽주(鄭夢周, 1337-1392)가 언양에 귀양와 남긴 몇 편의 시도 전해지고 있다.
 조선에 들어와서도 울산의 유학은 빈약할 수 밖에 없었다. 특출한 선학이 없었으므로 인재를 키운다는 게 그야말로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조선시대 500년간 특기할만한 인물을 배출하지 못했다. 아쉬우나마 여말선초에 유교의 실천윤리를 익힌 인물이 나타났다. 조선 중종 25년(1530년)에 완성된 인문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기록된 울산의 효자 송도(宋滔)와 언양의 신계은(辛繼隱)과 정상인(鄭尙仁), 정종문(鄭宗文) 등이다.
 정종문과 정상인은 고려말 삼은(三隱) 가운데 한 사람인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제자들로,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익혀 몸소 실천했다. 송도는 조선 세종 때 사람이다. 성균관 생원으로서 병든 부모를 간호하고, 잇따라 돌아가자 시묘살이를 했다. 그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세종 10년(1428년)에 효자로 정표(旌表)됐다. 그 행적을 기록한 정려비(旌閭碑)가 중구 북정동 울산동헌에 있다.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0호. 지금의 북구 효문동(孝門洞)이란 이름은 그의 행적을 기려 붙여졌다.
 조선은 국가이념인 유학을 퍼뜨리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울산과 언양에도 향교를 세웠다. 두 향교가 세워진 정확한 연도는 남은 기록이 없어 알 수가 없으나 세종 12년(1430년) 이전인 세종 초에 세워진 것으로 짐작할 수가 있다. 세종 12년에 언양향교에 교수관인 교도(敎導)를 파견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인구 500호 이상의 고을에는 교도와 훈도(訓導)를 파견했다고 한다. 당시 언양은 680여호가 살았다. 언양보다 큰 고을이었던 울산에는 그보다 앞서 교도가 파견됐을 것이다. 향교가 세워져 울산지역에도 문풍의 기운이 조금씩 피어나기 시작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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