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선 때 울산 유학의 계보는 영남학파의 퇴계학파에 닿아 있었다. 물론 문풍이 약하여 조선 세종 때의 송도(宋滔) 이후 100여년간 뚜렷한 인물을 배출하지 못했다.
 중종 때에 언양의 김신숙(金信叔)이 진사시에 합격했을 뿐이고, 여전히 특기할만한 인물을 낳지 못했다. 진사시에 합격한 김신숙은 그 행적이 알려져 있지 않다고 한다.
 그러다가 16세기 말 임란 때에 활약한 울산의 의병장들이 여말의 정몽주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영남학파의 퇴계학파에 학맥이 닿아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영남학파의 학통은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김안국(金安國)으로 이어진 뒤 퇴계(退溪) 이황(李滉)에서 완성된다.
 김종직은 세조 때에 울산 병영에 있던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영의 병마평사로 2년여간 머물면서 많은 시문을 남겼다.
 김안국은 중종 때 경상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울산향교의 학생들에게는 '소학', 언양향교 학생들에게는 삼강오륜을 강조하는 시를 남기는 등 지역 사림을 적극 발굴하여 천거했다고 한다.
 울산 사림 가운데 퇴계학파에 처음으로 닿은 이는 문헌에 따르면 임란 때 의병장이었던 이경연(李景淵)이라고 한다. 그는 울산의 토성 학성이씨 시조 이예(李藝)의 5세손이었다.
 그는 퇴계학파의 문인이었던 영천의 조호익(曺好益)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이경연의 '제월당선생실기(霽月堂先生實紀)'에 그는 10세 때까지 숙부에게서 배우다가 11세에 숙부의 권유로 조호익의 문하생이 됐다고 한다.
 이경연은 청장년기에는 조호익 뿐만 아니라 퇴계학파의 명사인 장현광을 비롯한 김우옹, 이덕홍 등이 모여 강설하는 자리에도 나아가 들었다고도 한다. 그로써 장현광의 문하생이기도 했다. 장현광의 '여헌선생급문제자록(旅軒先生及門諸子錄)'에도 그 사실이 기록돼 있다.
 이경연과 함께 나중에 의병장으로 크게 활약한 윤홍명(尹弘鳴)과 유정(柳汀), 이응춘(李應春), 장희춘(蔣希春), 서인충(徐仁忠 ) 등도 실기에서 시문 등을 지은 것으로 나타나 성리학적인 소양을 갖춘 인물들이었음을 알게 해준다.
 그렇게 조선 중기를 지나면서 울산 유학도 점차 활기를 띄기 시작하면서 숭문(崇文)의 고장으로 바뀌어 갔다.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