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서원은 조선 후기에 유림이 전국에 걸쳐 설립한 교육기관이다. 초기에 지방마다 설립된 향교가 공립 교육기관이라면 서원은 사립 교육기관이었던 셈이다. 지방마다 서원이 잇따라 건립된 것은 후기에 오면서 향교가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한 때문이었다. 또 유력 가문이나 학연으로 뭉쳐진 특정 세력들이 위세를 나타내려는 목적으로 서원건립에 나섰다. 한창 때에는 전국에 걸쳐 700여 군데에 달하는 서원이 들어선 요인이었다.
 울산에서는 효종 10년(1659년)에 향교의 봄철 석전제에서 김중태(金重泰)와 이기(李夔), 이정의(李廷義), 이동영(李東英), 배두첨(裵斗瞻) 등 11명이 서원창건을 발의하고, 기금 모금에 나서 11차례에 걸쳐 곡식과 많은 금품을 모았다. 그런 한편 현종 6년(1665년)에 서원건립에 쓰일 재목을 벌채하고, 건립처를 오산(鰲山)으로 정했다. 2년 뒤에 불이 나는 바람에 중지됐다. 현종 9년에 학성(鶴城)으로 옮겨 공사에 들어갔으나 다시 불이 나 중단됐다.
 두 차례의 비운을 겪은 끝에 숙종 원년(1675년) 8월에 건립처를 지금의 반구동 서원마을인 구강(鷗江)으로 정하고 땅을 사들였다. 다음해 공사에 들어가 숙종 3년(1677년)에 묘우(廟宇)와 신문(神門), 강당(講堂), 동서재(東西齋)를 완공했다. 서원건립을 발의한지 무려 18년만의 일이었다. 묘우는 숭도사(崇道祠), 신문은 유의문(由義門), 강당은 지선당(止善堂), 동재는 상지재(尙志齋), 서재는 경신재(敬身齋)라 이름지었다. 그리고 2년 뒤 숙종 5년(1679년) 정월에 정몽주와 이언적 두 분의 위패를 사당에 모셨다. 3월에 울산부사와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도유(道儒) 등 각계 인사를 초청하여 서원건립 축하행사를 했다.
 숙종 8년(1682년)부터 사액청원에 나서 4차례의 청원 끝에 남인집권기인 숙종 20년(1694년) 3월에 국왕의 윤허를 받았다. 청원 12년만의 성사. '구강서원고왕록(鷗江書院考往錄)'에는 '초아흐레날에 왕의 비답이 내렸다. 서원 이름은 학잠(鶴岑), 오산, 구강 셋을 올렸는데, 구강으로 낙점됐다. 윤오월 초하룻날에 정중하게 사액을 맞이하는 의례를 거행했다. 연회를 베풀고, 뱃놀이 불꽃놀이로 사액성취를 이레동안 즐겼다'고 기록돼 있다.
 울산의 서원건립에 있어서 가장 큰 난관은 사당에 모실 울산 출신의 출중한 선현이 없다는 점이었다. 구강서원에 그래서 고려 말 언양에 귀양와 인연이나마 맺은 정몽주와 이웃 경주 출신으로 경상도 관찰사를 지내면서 울산을 교화한 이언적을 모시게 된 것이다.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