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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일반인은 꿈을 꾸는 것이 과학의 연구 대상이라는 사실에 별로 주목하지 않을 것이다. 꿈이 과학적으로 탐구되는 것이 긍정적인 것이냐는 차지하고라도 꿈은 분명 엄연한 과학의 탐구 영역이다.
 우리가 잠을 자기 시작할 때 그것을 뇌파로 찍으면 그것은 분명 깨어 있을 때의 뇌파와 다르며 4단계의 특징적 변화를 거치다가 꿈꾸는 수면으로 넘어가게 된다. 그런데 4단계의 수면에서는 뇌파가 커지며 횟수가 적어지다가 꿈꾸는 수면에서는 뇌파 모양이 오히려 깨어 있을 때의 뇌파 모양과 비슷해진다. 그래서 어쨌든 그냥 수면과 꿈꾸는 수면은 질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인은 1~4단계의 수면이 75%를 차지하고 꿈꾸는 수면은 전체잠의 25%를 차지한다. 그래서 8시간 쯤 잔다고 할 때 1단계, 2단계, 3-4단계, 3단계, 2단계 그리고 꿈꾸는(REM) 수면으로 이어지는 사이클이 4-5번 돌아간다고 표현할 수 있다. 그래서 필자는 환자들에게 하루 밤 서너 편의 짧은 영화를 본다는 비유를 사용한다.

 꿈을 심리학적으로는 어떻게 볼 것인가 몇 가지 가설이 있는데 아마도 앞에서의 과학적 탐구가 완전해지면 어느 가설이 옳은 것인지 밝혀질 것이라고 기대한다. 프로이트는 억압된 심리내용의 위장된 모습이 꿈이라는 것이다. 융은 꿈은 나타난 대로 이며  '자연(신)이 보낸 편지'라는 입장인 것 같다. 이도 저도 아닌 아무 의미 없는 '물질의 장난'이 꿈이라는 가설도 있다. 즉, 잠의 과정을 이루는 신체 대사 과정의 부수현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부수현상으로 본다면 꿈에 나타난 이미지는 아무 뜻도 없는 우연일 뿐인 것이다.

 잠을 못자서 또는 악몽을 꾸기 때문에 병원을 찾는 환자를 봐야 하는 정신과 의사의 입장에서 보면 잠에 대한 과학적 소견과 더불어 꿈에서 펼쳐지는 심리 내용도 간과해서는 안 될  측면이라고 생각한다. 환자 전체를 보도록 해야지 뇌만 보고 마음이 전하는 것은 못 봐서는 안 될 것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그들이 표현하는 여러 어려움을 살펴보면 더욱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잠을 못자는 것이 문제이기는 하지만 잠을 못 잔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나 하는 심리적 태도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잠에 대한 심한 강박관념 때문에 잠을 못자는 사람도 있다. 잠은 결국 몸이 알아서 자는 것인데 본인이 의지로 잠을 이루게 할 수 있다는 듯이 앞서가는 경우를 말한다. 어떤 환자들은 잠은 잘 자놓고 밤새 꿈만 꾸었다고 불평을 하는 환자도 있다. 그럴 때에는 꿈을 꾸었다는 것은 잠의 이불 속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얘기해준다.

 잠에 대해 집착하는 사람들에게 또 들려주는 이야기로 잠을 비둘기라고 생각했을 때 비둘기가 손에 와 앉는 것이 잠을 자는 것이라고 비유한다면 비둘기가 손에 와 앉나 앉지않나 하고 계속 지켜본다면 비둘기가 손에 와서 앉을 수 있겠는가라고 물어본다. 모든 것이 그렇듯 마음을 비우고 여유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필자의 경우 잠을 자는데 도움이 되었던 것 또 하나는 꿈을 기록하는 일이었다. 융 심리학에서는 꿈을 기록해 그것을 시간이 지난 다음 다시 보면서 꿈을 시리즈로 보았을 때 나타나는 의미에도 주목하는 시간을 갖는데, 이런 의미를 찾는 것에도 도움이 될 뿐 아니라 내가 어떤 꿈을 꾸게 될까 하고 마음을 가볍게 하는 자세가 잠을 이루는 것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꿈의 이야기를 기록하다 보니 꿈은 어쨌든 '감정 그림'이구나 하는 인상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자기감정을 알고 싶을 때는 꿈에서 하는 이야기를 쳐다보면 도움이 되겠구나 하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꿈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 가지고 오는 그림이니 더 의미가 있는 것이며 다른 사람의 이야기보다는 직접적인 것이 아닌가.

 한번은 내가 바다 속에서 붙잡혀 왔다는 꿈을 꾸게 되었다. 내가 물고기였다는 것이고 바다 속에서 잡혀온 것인데 내가 있었던 바다 속에서 나와 관련 있는 칼을 찾아 그것을 보면, 나의 '운명' 같은 것을 알 수 있고 그러면 내가 물고기로 팔려갈 것인지 어떨지를 알 수 있다는 악몽을 꾸었다. 현실에서 들으면 웃음이 나오는 얘기지만 꿈속에서는 심각했었다. 이런 것을 가상의 진실이라고 하나. 카프카의 벌레로 변하는 소설이 왜 가능한지 실감하게 되는 꿈이었다. 이 꿈에서의 감정체험으로 나는 '고래시'를 쓰게 되었다. 꿈은 어쨌든 의미가 있었고 꿈의 체험에 의해서 이야기를 찾아갈 수도 있었다. 그런데 꿈의 이야기는 결코 고정시킬 수 없는 부분들을 그림에 담는 시적언어였다. 그렇게 꿈은 과학에서 보면 아무 의미 없는 물질의 부수현상 같지만 시적인 시각으로 보면 다양한 의미를 가진 자연적 그림이다. Liam이라는 심리학자는 꿈은 고래, 아마존 숲, 오존층처럼 우리가 보호해야 할 인간의 중요한 생태계라고 말한다. 꿈을 체험하여 잠을 지키고 건강한 자신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이 왜 마음의 오존층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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