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100여전 침탈의 역사가 고스란히 숨쉬고 있는 구룡포항. 며칠전 내린 눈으로 물과 뭍의 경계가 선명한 것처럼 일본가옥거리를 문화상품화하는 것에도 찬반이 분명하게 엇갈린다.


울산에서 925번 국도를 따라 흘러가는 길은 바다를 끼고 물처럼 흐른다. 급하지도 완만하지도 않은 길은 그래서 바다 풍광을 엿보기에 충분하다. 그 길 한켠에 일제강점기 침탈의 역사를 안고 있는 곳이 있다. 포항시 구룡포 일본식 가옥거리다. 1920년초 일제가 구룡포항을 축항하고 동해 어업을 점령한 현장이다. 국권을 빼앗긴 암울한 시간들은 오래전 사라졌지만 그때의 흔적은 아직 굳건히 버티고 서있다.
 
 
#아홉 마리 용이 승천한 바다

조선시대 풍수지리학자였던 남사고(南師古)가 '동해산수비록(東海山水秘錄)'에서 한반도는 호랑이가 앞발로 연해주를 할퀴는 모양으로, 백두산은 코, 호미곶은 꼬리에 해당한다.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한 이야기가 구룡포의 뿌리다. 전설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바다에는 검은색 절리가 가득하다. 신생대 화산활동의 흔적이다. 용암이 급격하게 냉각 수축되면서 5, 6각형 모양의 현무암 조각들이 층을 이룬 주상절리와 판상절리다.

 용이 승천한 바다에 생물들이 넘쳐났다. 청어, 대게, 고래, 오징어 할 것 없이 잡던 비옥한 구룡포 앞바다의 활기가 일제강점기 기구한 역사의 시작이 된다.
 일제강점기 도가와 야사브로라는 수산업자가 탐욕의 눈길로 구룡포를 알아냈다.
 조선총독부를 설득해 구룡포에 축항을 제안했고, 큰 배가 정박할 곳이 생기자 수산업에 종사하던 일본인들이 떼로 몰려왔다.

 당시 구룡포 앞바다에는 일본인 어선 900여척과 조선인 어선 100여척이 떠 있었고 소속된 어부들만도 1만여명에 달했다. 동해안 최대 황금어장으로 매일같이 만선의 깃발이 올려졌다. 선창에는 오징어와 청어가 넘쳐났고, 사케에 취한 일본인들이 휘청거리며 골목을 휘저었다. 빼앗긴 역사에 야만의 시간들이었다. 당시 구룡포에 주소를 둔 일본인만 1,000여명에 이르렀으니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 1938년 구룡포어업조합장을 지낸 하시모토 젠기치의 집을 개조해 만든 구룡포 일본가옥거리 홍보관. 1층에는 사진이, 2층에는 생활소품들이 전시돼 있다.


#100년전의 시간이 고스란히 내려앉은 골목

방파제를 쌓아 생긴 새로운 땅에는 그들의 집이 들어서고 그들의 의식주가 그 안에서 해결됐다. 조선인들은 일하는 존재일 뿐 그들만의 세상에 나아갈 수 없었다. 현재 구룡포 우체국 옆 골목이다.
 바다에서 열린 시야가 좁은 골목에 들어서면 이내 끊어지고 접혀진다. 골목은 좁은 길을 마주하고 선 2층의 집들로 촘촘하다. 풍어의 나팔을 불던 일본인들이 2층집을 지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구룡포는 이에 걸맞게 요릿집과 상점, 목욕탕, 은행, 이발소, 약국, 세탁소, 사진관, 잡화점 등 없는 것이 없었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100여 채 남아있던 일본인 가옥은 현재 50채 정도만 남았다. 얼마전부터 일본인 관광객들이 자주 찾아오면서 포항시는 거리 곳곳에 당시 사진을 붙여놓아 현재 모습과 비교하며 둘러볼 수 있게 했다.
 빛바랜 흑백사진속의 시간들은 그때의 암울한 기억들을 되돌려 놓는다. 환하게 웃고 있는 선술집 일본인들의 웃음을 찾아 현재의 일본인들이 오고 간다.

 이 오래된 길에서 드라마도 찍었다. 여명의 눈동자다. 일본 거리 촬영 세트로 이용됐다.
 골목의 중간 즈음에 넓은 정원에 2층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1938년 구룡포어업조합장을 지낸 하시모토 젠기치의 집이다. 현재 일본인 가옥거리 홍보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1층에는 당시의 사진들이 걸려있다. 창으로 들어오는 야윈 햇살에 방명록이 잠들어있다. 펼쳐보니 일본인 관광객들의 흔적이 선명하다.
 오래된 낡은 계단을 오르면 보기보다 넓은 내부에 생활용품과 당시 구룡포의 풍광, 인물사진 등이 전시돼 있다. 일본 특유의 문살과 그 당시의 신문과 잡지로 도배된 벽, 그리고 화로와 술잔, 후지산이 새겨진 유리 등이 그때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다다미방도 그대로다.
 
   
▲ 구룡포의 일본인 가옥 지도, 포항시는 최근 20여채에 대해 근대문화유산을 신청해 관광상품화를 꾀하고 있다.


#건재한 골목, 지워진 송덕비 두마음이 공존

언덕위에 있는 구룡포공원으로 향한다. 긴 계단은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듯하다. 구룡포공원은 일제가 그들의 신사와 도가와 야사브로 송덕비를 세우기 위해 만들었다.
 구룡포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그들의 신사를 세운 저의는 무엇이었을까? 공원에 오르면 구룡포항이 한눈에 넘칠만큼 펼쳐진다. 며칠 전 내린 눈으로 물과 뭍의 경계가 선명하다.
 눈 아래로 좁은 골목을 낀 일본식 집들이 눈에 띄고, 낡은 간판과 함석을 덧댄 녹슨 집들이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서있다. 멈춰버린 시간이 현재의 공간에 굳건하게 박혀있다. 그 시간들 위로 눈길을 헤집으며 걷는 늙은 걸음이 힘겨워 보인다.

 공원에는 시멘트로 비문이 지워진 공덕비가 서 있고, 그 뒤로 충혼탑과 충혼각이 서 있다. 해방이 되고  일본인들이 서둘러 떠난 자리에 적개심이 타올랐다. 구룡포 청년들로 구성된 대한청년단 30여 명이 신사를 부수고 송덕비에는 시멘트를 부었다. 비문을 지운 복수는 지금도 선명하다. 그러나 높이 5~6m는 족히 될 커다란 송덕비는 여전히 일본을 향하고 서 있다. 왜 그때 신사와 함께 파괴하지 않았는지 지금으로서는 알수 없는 일이지만 뒤쪽 충혼탑이 되레 왜소하다.

   
▲ 해방된후 일본인이 물러가자 대한청년단이 시멘트로 덮어 버린 도가와 야스브로의 송덕비. 높이가 5~6m는 족히 될만큼 크고 웅장하다.


 공원을 오르는 계단 좌우로는 비석이 줄지어 있다. 원래 일본인들이 공원을 조성하면서 공적자들의 이름을 새겨놓았던 것인데, 청년단원들이 시멘트를 발라 기록을 모두 덮고 비석을 돌려세워 그 곳에 구룡포 유공자들의 이름을 새겨놓았다.
 포항시는 최근 일본인 가옥 20여채에 대해 근대문화재로 등록을 추진하고 있다. 늘어나는 일본 관광객들을 겨냥한 정책인 모양이다. 일부에서는 송덕비 복원 움직임까지 일고 있다.

 침탈의 역사가 문화가 되고 관광상품이 되기도 하는 시대다. 우리에게 치욕의 시간들이 그들에게는 우월감에 기억되는 번영의 시간정도로 비쳐질지 모를 일이다. 
 일본인 가옥거리가 침탈의 역사에 대한 뉘우침과 교훈으로 남아야 보존의 가치가 있다는 일부 주민들의 말이, 그래서 설득력을 얻고 있다.  글·사진=김정규기자 kjk@ulsanpress.net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