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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가 수모를 당한 날은 망국이나 망국에 준하는 날이다.
 우리 근현대사에 국치일은 두 번이 있다. 하나는 병자년(1636년)에 청의 왕에게 당한 '삼전도의 굴욕'이고 나머지 하나는 '경술국치'이다.
 병자국치란 병자호란의 종전과 함께 당시 임금이었던 인조가 지금의 서울 송파구에 있는 삼전도에서 청태종 홍타이시 앞에 끌려나가 삼배구고두례라는 예를 올린 사건을 말한다.
 이 삼배구고두례는 여진족의 풍습으로 한번 절을 할 때마다 땅에 이마를 3번씩 박았다. 이날 인조의 이마에는 유혈이 낭자했다고 하니 이만저만한 치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 학교현장에서 한일합방으로 교육하는 경술국치는 1910년 8월29일 일본이 강압에 의해 우리 국권을 강탈해 간 날이다.
 일제는 동학혁명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이 땅에 군대를 들여놓은 뒤 치밀하게 조선침략을 준비했다.
 일제가 행한 조선침략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 하나는 내분책이었고, 나머지는 국제여론의 환기였다. 일제의 이 같은 전략은 경술국치 이후 더욱 노골화되었다.
 조선사회의 내분책을 위해 동원된 의식화 기관은 '조선사편수회'가 그 중심에 있었다. 조선 문화를 동경하면서 문화적 콤플렉스에 시달려온 일제가 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조선문화의 부정이었다.
 실제로 일제는 초대총독 데라우치가 취임하자 곧바로 조선에 산재해 있는 '단군조선' 관계 고사서 21종 20여만권을 전국적으로 색출하여 불태워버리는 희대의 분서갱유를 단행했다. 이와함께 일제는 을사오적의 중심인 이완용 권중현을 고문으로하는 '조선사편수회'를 조직, '실증사학'을 내건 이병도 등 친일사학자를 동원해 우리역사의 분탕질에 몰입했다.
 일제가 만든 '조선사편수회'는 식민사관에 입각한 조선사편찬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1937년 전35권 2만 4,000쪽에 이르는 조선사를 완성했다. 일제의 주도로 만든 이 책은 외관상으로는 모든 사료를 망라하여 서술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식민사관에 입각해 자신들의 '문맹개화론'의 근거로 사용했다.
 무지한 조선인들의 태생적 한계를 조작하고 나아가 역사적으로 우위에 있는 자신들이 조선인을 개화한다는 논리의 중심은 이처럼 비열한 역사 콤플렉스가 이글거리고 있었다.문제는 일제가 물러간 이후의 우리 역사교육이 경술국치보다는 한일합방에 익숙하도록 만든데 있다.
 '조선사편수회'의 중심인물들은 곧바로 우리 역사교육을 담당할 역사교사 양성소의 주역이 되었고 이들에 의해 날조된 우리역사는 2세 교육의 지침이 되어버렸다.
 한걸음 더 나아가 조선사편수회를 계승한 국사관과 국사편찬위원회를 조선사편수회의 주역들이 주도했다는 점은 얼굴이 붉어지는 일이다.
 우리가 경술국치나 병자국치를 잊지 말아야하는 이유는 부끄러움을 잃지 말자는데 있다. 국치를 국치로 가르치지 않은 국사교육의 부끄러움은 결국 일본의 역사왜곡에 당당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우리 정부의 부끄러움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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