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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전리 각석


오늘날과 달리 왕조시대에 임금이 왕궁을 벗어나 지방을 순행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울산과 가까운 지금의 경주인 서라벌이 왕도(王都)였던 신라시대에도 쉰여섯의 임금 가운데에 울산을 찾은 왕은 한 명밖에 되지 않는 것에서도 알 수가 있다. 교통과 숙소는 물론 호위를 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 어려움을 감내하고도 지방을 순행한 왕이 상당수에 달했음을 역사기록은 보여준다. 울산에도 세 명의 국왕이 다녀간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한 명은 울산을 다녀간 다음 해에 왕위에 올랐으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두 명이 다녀간 셈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기초를 닦은 제24대 진흥왕(眞興王·재위 540~576)은 23대 법흥왕 26년(539년)에 어머니 지몰시혜비 등과 함께 천전리 각석 계곡을 찾았다.

 천전리 각석의 아랫 부분에 새겨진 글자를 신라 명문(銘文)이라고 하는데, 오른쪽 것은 먼저 새겨진 것이라서 원명(原銘), 왼쪽은 나중에 새긴 것이라서 추명(追銘)이라 한다. 추명에 그 사실이 적혀 있다. 진흥왕은 6세였으며, 울산을 다녀간 다음해 7세에 왕위에 올랐다. 당시 천전리 계곡은 신라왕실은 물론 승려와 화랑도가 즐겨 찾던 곳이었다.

 진흥왕 다음에 울산을 다녀간 신라 임금은 처용설화로 유명한 제49대 헌강왕(憲康王·재위 875~886)이다. 헌강왕은 즉위 5년(879년)에 친정(親政)을 하면서 3월에 동쪽의 주군(州郡)을 순행했다고 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헌강왕'조에 나온다.  왕이 순행한 곳은 울산의 개운포였다. 개운포에서 처용을 만나 서라벌로 데리고 갔다. 삼국유사 '처용랑 망해사(處容郞 望海寺)'조에 자세한 내용이 기록돼 있다.

 헌강왕 때를 고비로 통일신라는 내리막길을 걷게 되는데, 왕의 순행을 단순히 친정체제를 구축하려는 것이라기보다는 점차 강성해지는 지방세력을 위무하기 위함으로 보기도 한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왕도에서 보면 울산은 국토 동남단에 치우친 극변(極邊)지역으로, 임금의 순행을 바라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고려 제6대 성종(成宗·981~997)은 동도(東都)인 경주를 순행하는 길에 흥례부(興禮府), 즉 울산을 찾아 태화루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성종이 왕위에 오른지 16년째 되는 38세 때인 997년 9월이었다. 성종은 태화강과 드넓게 펼쳐진 들판 너머로 아스라이 바다가 바라다 보이는 풍광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천하일품의 풍광에 찬사를 연이어 쏟아냈다. 안타깝게도 바다에서 잡아다 바친 큰 고기를 먹고 병환이 들어 환궁한 뒤, 곧 바로 승하했다. 고려사에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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