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를 듣다보니 송창식과 윤형주가 불렀던 이란 노래가 흘러나온다. "헤어지자 보내온 그녀의 편지 속에/ 곱게 접어 함께 부친 하얀 손수건/ 고향을 떠나 올 때 언덕에 홀로 서서/ 눈물로 흔들어주던 하얀 손수건" 이게 언제 적 노래인가. 과 더불어 트윈폴리오의 이별 노래 가운데 가장 유명하고 자주 불렸던 노래인데, 하도 오랜만에 듣다보니 멜로디보다는 '하얀 손수건'이란 가사가 도드라지게 귀에 들어온다. 아마 요즘은 손수건을 잘 사용하지 않고, 그것도 이별의 선물로 하얀 손수건을 보내는 일이
꽃시장에서 작은 화분 하나를 사 왔다. 봄을 알린다고 올라오는 앙증맞은 꽃송이를 보고 있자니 마음에 단비를 만난 듯 기운이 살아난다. 휑한 거실에 나비처럼 사뿐히 날아든 진홍빛 시클라멘 하나가 집안 분위기까지 환하게 바꾸어 놓는다.화사한 분위기도 잠시, 오종종 고개를 내밀던 꽃대가 며칠 사이에 시들어가고 있다. 행여 새로 이사 온 집이 불편해서 그런가, 물을 주고 볕이 잘 드는 책상 위에다 자리를 옮겨도 소용없다. 무엇에 허기가 졌는지 정성을 들일수록 점점 생기를 잃어간다. 아무래도 오래 곁에 두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나는 예전
선운사 내원궁 앞에 섰을 때부터 번민의 연속이었다. 인솔도우미가 찬 시멘트 바닥에 깔아 둔 얇은 돗자리 위로 신발을 벗고 올라서라 했다. 내 발을 들여놓고 뒤돌아보니 그 자리에도 오르지 못하고 두 손을 합장한 이들도 있었다. 고개를 돌려 신발을 벗고 내 옆으로 발을 들여 놓으라고 눈짓을 해도 괜찮다고 보살 미소를 지었다.연분홍 봄날의 바람기 같은상춘객의 공염불문득 돌아보는 뒤늦은 후회에그날 영 헛불공만은 아닌듯그때, 두 손을 합장한 채 안도하는 내 욕심을 읽었다. 그녀가 올라섰더라면 신발을 벗은 상태로 세멘트바닥으로 비켜선 내 발이
저녁나절에 쏟아지던 폭우가 울던 아이처럼 뚝 그친다. 이런 날은 가슴이 설레어 나도 모르게 산책을 나간다. 장딴지가 적당히 긴장할 정도의 경사진 길을 걸어 도도록한 언덕 위에 서면 오감에 이완을 느낀다. 모처럼 맑게 트인 북쪽 하늘의 흩어지는 구름 사이로 보라색 하늘 하나가 더 열린다. 장마 중의 우울했던 기분을 걷어내기에 이보다 더 좋은 선물이 있을까.며칠 사이 훌쩍 커버린 원추리가 나와 키 재기라도 하려는 듯 눈을 맞추고 활짝 웃는다. 잠시 날씨가 드니 한껏 기운이 오른 녹색 잎사귀 사이로 껑충한 주황색의 화려한 군무가 상쾌하다
텔레비전의 뉴스에 어느 배우의 결혼 소식이 나오고 있다. 웨딩드레스가 아닌 한복차림으로 시집간 모습이 화면에 나온다. 족두리 쓴 예쁜 배우의 소려히 꽃수 놓은 연미색 한복에 분홍색 옷고름이 달려 있다. 은은한 한복도 아름답지만 화사한 분홍 옷고름 하나가 시집가는 새색시임을 단번에 나타낸다. 길지 않게 사뿐히 매어져 있는 분홍빛 옷고름이 세상에 없이 행복한 새신부의 증표로 채색된다. 그저 나붓이 빼어 낸 두 가닥 옷고름인데 색깔에 서려 든 저력이 저리도 선명하다.여자 아이들이 서너 살쯤 되어 스스로 모양과 색깔을 선택할 줄 아는 나이
언제부터였는지 몸이나 마음이 무료해지는 것 같다. 사람을 만나는 것에서부터 일을 하는 것에서도 그렇다. 어떤 여건에서 꼭 만나야 되는 사람이 아니라면 과연 이 만남을 지속해야만 하는 가 스스로에게 자문하는 일이 많아졌다. 연말연시를 비롯해 연례행사처럼 생기는 모임에도 마음이 가지 않았다. 부담스럽고 수선스럽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언제부터인지 그런 생각은 극히 자연스럽게 다가왔다.한동안 내게 연이어 일어나는 일련의 것들이 단순히 체력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체력의 한계도 무시할 수는 없다. 뿐만 아니라 관계 맺기의 의문이나 부
지금쯤이면 경부고속도로가 빤히 보이는 경주 내남 부지리 마을 뒷산에는 어린 시절 참꽃이라 부르던 진달래가 한창때를 막 벗어났을 게다. 동시에 빼곡한 솔숲에는 아쉬운 연분홍을 시기하듯 요염한 철쭉이 흐드러지고, 솔잎은 더욱 청푸른 미소로 실바람에 솔향을 흩뿌릴 것이고, 인근 청보리밭 절구통 허리가 바지 바깥으로 미어터지는 보릿대 냄새까지…. 이른바 "山 넘어 南村에는 / 누가 살길래 / 해마다 봄바람이 / 南으로 오네 // 꽃피는 四月이면 / 진달래 향기 / 밀 익는 五月이면 / 보리 내음새(김동환, 조선문단 18호, 1927)" 노
비행운을 보면 지금도 가슴이 뛴다. 홀연 나타나서 하늘을 곧게 가로지르며 나아가다 뒷부분부터 솜털이 풀리듯 풀어지며 마침내 사라져 가는 비행운. 비행운은 소실점으로 멀어지는 철로 위를 달리는 기차나 항구를 떠나 먼 바다로 나가는 배가 그러하듯, 우리를 어떤 머나먼 곳, 미지의 낯선 곳으로 이끄는 듯하다. 기차나 배는 기적 소리와 뱃고동 소리로 출행을 알리지만, 비행기는 넓은 하늘을 지나며 어떤 출행의 소리를 낼까. 그건 아득한 허공의 일이어서 우리로선 알 길이 없으니, 소리 대신 머플러처럼 기다란 비행운을 그 흔적으로 남기는 것일까
봄이다. 매화, 목련에 이어 개나리, 진달래, 벚꽃이 다투어 인사를 한다. 만발한 벚꽃에 탄성을 지르며 자전거 길을 달리다 보니 어느새 선바위 근처에 닿았다. 강물은 소리 없이 흘러가고 가로수 꽃잎들 사이에는 벌들의 잔치가 야단스럽다. 봄 꽃 릴레이로 흐드러진 태화강그 빛나는 속살속으로 난 자전거길전국에서 이름난 라이딩 코스지만곳곳서 보이는 오물에 부끄러움만태화강 백 리 길 요소요소에는 라이더들이 쉬었다 가기에 안성맞춤인 데크들이 놓여 있다. 참새가 방앗간에 들리듯 벤치에 앉았다가 발아래 숨은 쓰레기 꽃들을 보는 순간 얼굴이 화끈거
스스로 복작복작 속을 긁는 일이나, 남을 향한 원망은 하루에 몇 번씩 하는 설거지처럼 훌훌 흘려보내기가 쉽지 않다. 오늘도 달그락달그락 부딪히는 그릇 소리만큼이나 복잡한 사연이 설거지 사색대 위에 올랐다.하고 많은 시간 중에 왜 설거지를 할 때마다 미뤄뒀던 말이 생각날까? 제때 못한 인사도, 하고픈 말도 꼭 이때 생각나는 이유가 뭘까. 앞치마를 입었고, 고무장갑도 꼈고, 손에는 주방 세제가 묻어 있는데. 전화를 걸어 방금 생각났다고 미뤄놨던 말을 하기에는 상황이 번거롭다. 쌓아두면 체기가 될생각의 찌꺼기들도훌렁훌렁 보낼 수 있다면그
활짝 꽃 핀 벚나무가 호수로 가지를 드리운다. 늘어진 꽃가지들 사이로 잔물결에 원앙 한 쌍이 놀고 건너편의 나지막한 능선이 부드럽다. 황금빛 햇살에 호수가 반짝이더니 그새 노을이 든다. 노을도 벚꽃물이 들어 연분홍으로 번진다. 원앙과 호수와 능선, 노을이 벚꽃가지에 걸쳐져 평화로운 그림 한 폭이다. 벚꽃이 만발하니 연붉은 살구꽃도 필 것이다. 흰 배꽃이 가지에 펼쳐지며 분홍빛 복사꽃이 몽환적으로 피리라."하돈갱(복국)은 복숭아가 아직 떨어지기 전에 복어를 청미나리와 조화하여 유장으로 국을 만들면 진미하다." 의 한 구절
설을 목전에 두고 무던히도 바빴다. 두서없이 어수선한 사무실에 어르신이 노크도 없이 불쑥 들어섰다. 일에 정신이 팔려있었던 터라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서는 바람에 많이 놀랐다. 가끔은 학생들이 일부러 작정하고 놀라게 해 혼을 내기도 한다. 그러나 낯선 이에게 무어라 말도 못하고 잠시 넋 놓고 바라보기만 했다. 그의 손에는 복조리가 수북했다.매년 겪는 일이라 또 그때가 되었구나 싶었다. 어르신은 들고 있던 복조리 한 쌍을 먼저 내밀더니 다짜고짜 사라고 한다. 속내야 거절하고 싶음이 간절했지만 그냥 입을 다물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어떤 모습일까? 영미문학권에서 사랑의 시인으로 잘 알려진 V. 드보라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할 때라고 했다. 그리고 그 모습은 누구나 손쉽게 떠올릴 수 있다. 매사에 눈은 평안하고 입 꼬리는 살며시 올라가 있을 것이다. 프랑스 『레 미제라블』(Les Miserables, 1862)의 작가 빅토르 위고는 최고의 행복을 사랑받고 있음을 확신할 때라고 했는데, 역시 V. 드보라와 같이 사랑과 연결시켰다. 누군가는 소박하게 살아있는 지금 이 순간이라고 했고, 또 누군가는 세속적으로 평소 바라던 바가 모두 이루
얼마 전에 라는 영화를 보았다. 제목을 보면 월요병에 걸린 샐러리맨의 바람을 영화화한 건가 싶은데, 실제 내용은 암울한 미래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일종의 SF 영화이다. 폭발적인 인구 증가로 물과 식량, 자원 등이 부족해지자 1가구 1자녀로 산아제한을 실시하고, 다른 자녀들은 이런 문제들이 해결된 뒷날에 깨어나게 냉동장치에 넣는 미래 어느 시대가 배경인데, 이 와중에 일곱 쌍둥이가 태어나고 할아버지는 쌍둥이 자매들에게 일주일의 이름을 붙여 몰래 키운다. 그녀들은 자신의 이름과 같은 요일에만 외출하며, 밖에서의 경
평창 올림픽이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 92개국에서 약 삼천 명의 선수들이 참여하여 저마다의 기량을 선보이고 돌아갔다. 웃고 즐기는 사이, 정해진 시간은 끝이 났지만, 최선을 다하던 선수들의 모습은 머리에서 쉬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이번 올림픽 경기가 훈훈했던 건, 스포츠 정신을 실천한 선수들의 참모습 때문이 아닌가 싶다. 메달에 가치를 두는 승리를 위한 참여가 아니라 노력하는 과정에 더 큰 의미를 두는 선수들 모습에서 올림픽의 순수한 목적과 정신이 제대로 실현되었음을 실감한다. 메달을 따지 못해도 환한 얼굴로 돌아가는 선수들을
요즘, 어떤 사물에 대해 '아이'라는 말을 잘도 갖다 붙인다는 걸 느낀다. 애완동물은 물론이고 꽃에도, 옷에도, 어떤 공산품에까지 구별 없이 붙이는 걸 예사로 본다. 옳지 않은 말인 줄 잘 알 텐데 여기저기서 어렵잖게 듣게 되어 불편하건만, 언젠가부터 내 안에서도 '마음 아이' 하나를 키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시대가 어려워 생긴 신조어 중에 '헬조선'이란 말이 있다. 지옥을 뜻하는 'hell'과 '조선'을 합해서 만든 말이다. 신분 사회였던 조선처럼 소득 수
상이란 것을 드문드문 받아본 기억이 있다. 그러나 수상자 후보군에 들었을 때의 설레는 기분은 오래가지 않았던 것 같다. 상을 받은 뒤에는 대개 그 무게로 인해 마음이 자유롭지 못해 족쇄라는 낱말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곤 했다. 언제부터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상과는 무관한 일상이 오랫동안 이어졌다.그러던 어느 날 지인의 전화를 받았다. 자신에게 상을 주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이다. 중견기업을 거느리는 사람이다 보니 본인이 상을 주거나 격려를 해야 하는 입장이라 자신까지 살필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어느 결에 회갑이 다가와 지나간
어릴 적 시골집 안방 벽엔 두레상이 걸려 있었다. 검은 칠을 입힌 상이 벽 한쪽을 커다랗게 차지했다. 식사시간 외에는 벽에 박은 대못에 다리를 접은 두레상을 걸어 고정시키고 방의 공간을 넓게 쓰는 것이었다. 계획을 세우기 보다는판을 짜는게 안정감을 준다투박하지만 만만한방안에 걸려있던 판처럼할머니는 두레상을 꼭 판이라고 명명했다. 끼니때가 되면 "판 패야지." 하며 두레상을 벗겨 내려 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일인용 밥상으로 각각 독상을 받았다. 할아버지, 아버지의 일인용 상은 어딘지 높여 부르는 듯한 '상'이라고 표
출근길에 딸이 도시락이 든 쇼핑백을 들려준다. 받아든 손이 떨린다. 딸도 쑥스러운지 대충 만들었다며 기대는 하지 말란다. 아이가 처음으로 싸준 도시락이다. 가끔은 엄마가 싸준 도시락만 받아먹었는데 이만큼 자라서 자주 예쁜 짓도 한다 싶었다. 시간의 감사함일까. 이 귀한 것을 아까워서 어떻게 먹을까 했더니 종종 싸줄 터이니 맛있게 먹으라며 돌아선다. 나는 쇼핑백을 들고 쉽게 집을 나서지 못했다. 딸이 싸준 첫 도시락에 오버랩되는그겨울 어머니의 따뜻했던 도시락어느 봄날나도 당신이 좋아하는 것들로 싸생으로 걸어왔던길 같이 가고 싶다사무실
요 며칠 날씨가 바짝 추워졌다. 울산 기온이 영하 10도라니. 추위는 미세먼지까지 얼려버리는 걸까? 하늘에 손을 대면 투명한 코발트빛 허공이 와장창 쏟아질 것 같다. 사선으로 치고 들어오는 햇살은 또 얼마나 빛 부신지 난시 심한 내 눈은 실눈을 뜨거나 한쪽 눈을 감고도 눈물을 내비친다. 무더운 여름날 문득 그리워지기도 했던 날씨지만 마냥 반가워 할 수만은 없다. 햇살을 외면해야 하는 눈을 가진 탓.창밖에는 쨍한 하늘이 있고, 선그라스 착용에도 불구하고 눈은 부시고, 라디오에선 백석 시인의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