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래되었지만 찰턴 헤스턴이 미켈란젤로로 나오는 '아거니 앤 엑스터시'는 지금도 화가의 삶을 다룬 영화들 가운데 수위로 꼽힌다. 우리말로 하면 '고뇌와 환희'로 번역할 수 있겠는데,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의 벽화를 그리면서 겪게 되는 고통과 희열을 다루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미켈란젤로가 화가가 아닌 조각가로 방점이 찍혀져 있다는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최후의 심판' '천지창조'라는 프레스코화로도 유명하지만 '피에타' '다비드상' 같은 조각으
동짓날이다. 불교에서는 작은설이라 하여 새해 맞이하는 날이기도 하다. 올해도 동지를 절에서 보내기로 마음먹고 길을 나선다. 내가 다니는 절은 '참 나를 찾는 절'이라 하여 도량이 넓고 신도들이 꽤 많은 편이다. 근래 연로하신 큰스님이 편찮다는 소식을 들은 터라 궁금한 것이 많다. 종무소에서 바쁜 보살을 붙잡고 이것저것 물어보고 있을 때다. 뒤에 서 있던 낯선 스님 한 분이 대답을 대신한다. 처음 뵙는 스님이라 더 묻고 싶은 말이 있어도 참고 종무소를 벗어난다. 참모습을 보지 못하는어리석음에 일침을 가하는,내 속을빤히
연말부터 새해에 접어든 지 닷새째인 오늘까지도 사방에서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인사가 날아든다. 나도 얼른 '새해 복 받으세요'라는 답장을 보내야 하는데 그 말이 쉬이 나오지 않는다. 어느 곳에도 복을 저축해 둔 적 없는 내가 누구더러 복을 가지라기엔 염치가 없다. 어디엔가 쟁여 둔 복이라도 있으면 두루 나누면 좋으련만. 새해 복을 받으라고는 하나 어느 집 누구한테 받으라는 구체적 명시가 없으니 혼자 반성하고 깨우칠 뿐이다. 복을 지은 적 없어서 '새해에는 예쁜 복 지어 많은 복 거두시길 기원
12월 한파가 기승을 부린다.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발걸음 재촉하는데 마주 오던 청년의 눈빛이 내 앞에서 잠시 흔들리더니 휙 스쳐지나간다. 누구지? 나를 알아보는 것 같은 눈빛이 영 떨쳐지지 않는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눈빛에 매달리다 한 순간 무릎을 칠 뻔했다. '그래, 천용이야.' 확신할 순 없지만 왠지 천용이 같은 느낌이 들었다.처음 아이들을 만난 것은 학교를 그만 두고 빵집을 연 한참 후였다. 어느 날 얌전한 우리 메이트가 빵집으로 들어서는 아이들을 몰아내려 애쓰는 것이 보였다. 왜 그러느냐고 물어도 대답도
바쁜 일상 속에서도 가끔은 강을 바라볼 때가 있다. 오늘처럼 아침이 밝아오기 전의 강을 바라보게 될 때는 여간 부지런을 떨지 않으면 안 된다. 물길은 지난밤에 일어났던 것들을 밀어내고 새로운 것의 경계에서 바람마저 고요하다. 이렇게 태화강 하류의 호사를 누리며 살고 있다.나는 강 하류에 산다. 태화강이 끝나고 바닷물이 섞이는 이곳에 처음으로 둥지를 틀 때는 철거되는 마을에서 달리 갈 곳도 없었을 뿐더러 주된 생활권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은 것도 이유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아파트 앞 동 사이드로 잔잔하게 흐르는 강을 바라볼 수 있음이
몇 해 전, '얼굴에 그나마 볼만한 곳이 코이다.'로 시작하는 코에 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이번엔 반대로 얼굴의 약점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내 약점은 바로 눈이다. 그러니까 이 글은 '내 얼굴에 가장 불만스러운 곳은 눈이다.'라고 시작해도 좋을 것이다.나는 고도의 근시에 난시까지 겹쳐져 시력이 아주 나쁘다. 중학교 때부터 안경을 쓰기 시작했는데, 당시엔 안경을 쓴 사람이 드문 편이어서 한동안 눈이 네 개라는 뜻인 목사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지금은 플라스틱 압축렌즈 기술이 발달해서 안경이 훨씬 가벼워졌
제가 아는 분이 문화수상자로 선정되었기에 축하를 드리러 가는 날이다. 마치 내가 상을 받는 것처럼 들뜬 마음으로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가로수의 잎들도 그들을 축하하고 싶은지 팔랑팔랑 기립박수를 보내는 듯하다.시상식 장소가 문학인들이나 예술인들이 흔히 드나드는 곳이 아니었다. 어느 회사에서 한다는 말을 듣고 처음엔 의아했지만, 골똘히 생각해보니 생소한 자리에 내심 마음이 더 끌렸다. 그 회사는 울산 석유공단으로 향하는 초입에 자리하고 있었다. 드디어 문화상을 제정한 분이 모습을 드러냈다. 미수를 바라보는 연세였지만 아담한 키에 지팡
늦은 시간에 통도사로 향했다. 다급함 때문인지 차는 번번이 제 속도를 초과했다. 싸늘한 잿빛 하늘이 내 마음 같았다. 매표소 창구에 다다르자 일곱 시까지만 나오면 된다니 조금은 여유가 있었다. 서두른 보람이다. 입구에서 사찰까지는 자동차로 제법 들어갔다. 오래전 지인과 한 번 다녀 간 터라 조금은 낯설었다. 지척에 주차장을 두고도 지나쳤다가 되돌아 나오기를
노란 낙엽비가 시청 앞 도로를 적시고 있다. 조금 전까지 나무라는 세계에서 나무를 전부로 알고 살았던 나뭇잎들이 훌훌 떠나가고 있다. 곱고 화려했던 어제와 오늘 모두를 버리고 미련 없이 돌아가는 낙엽에서 문득 나의 길이 보인다. 그날은 언제가 될까. 감상에 빠져 강의실을 향해 걷는데, 저만치 낙엽을 맞으며 오시는 스님. 한 폭 풍경화 같아 감상하는데 스님께
혼밥이니 혼술이니 해서 요즘 나홀로족이 하나의 추세라고는 하지만 나홀로족에도 급이 있는 모양이다. 혼자 어디까지 해봤어? 하는 물음이 인터넷상에 떠도는데, 혼밥족의 경우, 예컨대 편의점에서 혼자 김밥이나 도시락 먹기가 입문 단계라면 일반식당에서 혼자 밥 먹기는 중간 단계, 고깃집에서 남의 눈치 안보고 혼자 고기를 굽는 정도라야 혼밥족의 진정한 지존이라는 식
가끔 내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몹시 궁금할 때가 있다. 얼마 전에 물주머니의 밑이 터진 것처럼 내 입에서 상스러운 말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코를 심하게 고는 사람이 자신의 코골이 소리에 자다가 놀라듯이 나도 생각지 못했던 험한 말을 중얼거리고 있어 당황했다. 올해로 다섯 살 된 당마가목이 처음으로 탐스러운 열매를 맺어 추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짬을 내어
그 길이 아닌 것 같다.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들었나보다. 배냇골 가는 길을 왼편에 두고 오른쪽 밀양 방면으로 접어들어 이만큼 왔는데도 그 풍경이 보이지 않는다. 그곳에 가려면 어디쯤에서 가닥을 잡아야 할까. 망망대해에 내던져진 것 같은 막막함이 엄습한다. 마침 공간 여유가 있는 갓길이 있어 잠시 차를 세운다. 건너편 능선들이 아름다워 그쪽을 향해 차머리를
거실 한 켠에 이층 장롱 한 벌이 놓여 있다. 아직도 제 자리를 찾고 있는 중이다. 언젠가 고향집에 갔던 남편은 늦은 밤 이층 장롱과 함께 들어왔다. 지친 몸과 마음도 덩달아 소파에 부려지는 듯이 앉았다. 시어머니의 남은 유품이다. 각진 장롱 속은 텅텅 비었다. 시댁의 안방에서 시어머니의 몇 벌 되지 않은 여벌 옷가지들이 들어 있던 장롱이다. 당신이 생전에
막 쪄낸 송편을 덥석 베어 물었다. 베어 문 떡이 너무 뜨거워 얼결에 꿀떡 삼켜버렸다. 타는 불덩이 하나가 서서히 아래로 훑어 내려간다. 가슴을 치며 찬 물 한 사발 단숨에 들이켰다. 뜨거움이 누그러지자 눈물이 찔끔, 한 숨이 휴 나왔다. 정신이 들고서야 후딱 뒤를 돌아보았다. 혹시 누군가 이 모습을 보았을라나 돌아보다 웃음이 피식 나왔다. 추석 며칠 앞두
요즘 외국인들에게 우리나라의 호미가 인기 있는 농기구라고 한다. 아마존닷컴에는 호미가 한국의 5배 이상 가격에 올라와있고, 상품평도 '최고의 정원 도구' '소박한 구조이지만 기능적이다.'와 같은 호평이 많다고 한다. 농기구계의 한류라고나 할까. 그러고 보니 호미를 사용하는 외국인은 그림으로든 사진으로든 본 기억이 없다. 우리가 호미로 할 수 있는 일
텔레비전에서 한 남자를 본다. 암에 걸린 아내를 잃고, 뇌전증을 앓는 세 아들의 병원비로 전 재산을 고스란히 쓸어 넣고 지친 몸과 마음을 둘 데 없어 산에 들어가서 살고 있다. 오두막을 짓고 도토리를 주워 묵을 만들고 무, 배추 두어 이랑을 심어 김장을 담그면서 이 년째 살고 있는 남자는 한글을 잘 쓸 줄 모른다. 그는 냉장고 글씨를 어릿어릿하며 쓰고 병원
온 대지를 밤낮으로 달구던 더위도 처서를 찍고 나니 아침저녁으로 공기가 다르다. 아파트가 밀집된 도회지와는 달리 주변이 산인 텃밭은 더한 것 같다. 더위에 지친 때문인지 가을은 이미 마음에 와 있었던 것 같고, 건조해지면서 거칠어진 손이 더 밉게 보인다. 부지깽이도 일손이 된다는 시골 농번기에 내 작은 손은 몇 사람 몫의 일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을이다.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한 사이, 달리는 여름의 어깨 뒤에서 가을은 뚜벅뚜벅 오고 있었나 보다. 열어젖힌 새벽 창으로 밀려들어오는 서늘한 공기, 문득 올려다 본 아찔하도록 푸른 하늘과 뭉게구름을 통해 가을은 서서히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반갑다. 시간의 얼레는 내가 좋아하는 백일홍 꽃을 여기저기 피워 놓고, 봉숭아 채송화 끝물 모습을 초가을 풍경답게
김애란의 '나는 편의점에 간다'란 소설에는 편의점을 중심으로 소비생활을 영위하는 주인공이 나온다. '나는 편의점에 간다. 많게는 하루에 몇 번, 적게는 일주일에 한번 정도 나는 편의점에 간다. 그러므로 그사이, 내겐 반드시 무언가 필요해진다.' 라는 구절이 소설의 처음과 끝에 배치되어 수미상관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이 소설은 편의점을 두고 벌어지는
지난 일월 중순 포항 죽도시장에서 점심을 먹었다. 사람들은 활어센터의 즐비한 수족관 앞에서 취향에 따라 횟감을 주문한 후에 미로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보이지 않는 안이 궁금했다. 남편은 우리도 들어가 보자는 표정이다. 횟감을 주문하고 앞 사람들을 따라 현관이랄 것도 없는 공간에서 신발을 벗고 경계표시만 시늉한 문지방을 넘으니 방이다. 한 평 남짓한 방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