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4일, 그러니까 오늘은 울산신문 창간 9주년이 되는 날이다. 9주년이라면, 나무로 치면 어린 나무에서 벗어나 성목을 향해 힘차게 발을 뻗는 시기이다. 온라인 신문이나 포털 뉴스 검색이 늘어나면서 종이신문의 위상이 흔들리고는 있지만 특집이나 기획기사 등 심층적인 주제를 다루거나, 직접 발로 뛰며 취재를 하고 보다 책임있는 뉴스를 내보내는 데는 종이신문
아침부터 푹푹 찐다. 볕이 이글이글 가마솥더위로 달아오른다. 가뭄이 든 텃밭에는 한창 수내기를 키우고 열매를 달아야 할 옥수숫대와 오이, 고구마 순이 새들새들 숨을 할딱거린다. 이럴 땐 잠시 지나가는 비라도 한바탕 시원하게 쏟아졌으면 좋으련만. 가물어 터진 칠월 염천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농사를 짓는 이나 농작물이나 다 같이 진이 빠진다.
명숙이와는 중·고등학교를 통틀어 4년 동안 짝꿍을 했다. 시골에서 살다보니 초중고를 나란히 같은 학교로 진학하는 경우가 있는데 우리도 그랬다. 명숙이 동네는 명촌, 내 동네는 못안. 당시에는 둘 다 고향 상북면의 대표 깡촌이었다. 우리는 그 먼 거리에 놓인 서로의 집을 오가며, 밥을 먹고 서로의 가족과도 사겼다. 마치 야시마 타로가 쓴 일본동화
창작과 비평사(창비)를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 3학년 때다. 시의 종류에 대해 배울 때, 참여시의 예로 국어 선생님은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이란 시를 읽어주셨다.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로 시작하는 그 시는 교과서에 나오는 어느 시와도 달랐다. 강렬하고 호소력이 있었다. 나는 충격에 빠졌다. 교무실에 찾아가서 시의 전문을 베
사람들은 대부분 사랑해서 결혼한다. 한때 죽고 못 살만치 달아오르던 남녀의 정분도 시간이 흐르면 미지근해지거나 퇴색되고 마침내 '이별'을 택하는 경우를 간혹 본다. 소중한 인연이 갈라서기로 마음을 정하면 지난날 함께 그렸던 아름다운 무늬는 정리해야 한다. 그런데 만약 둘 중 한 사람이 일방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을 다 하고 난 후에 맞는 이별이라면 더 견디
벨기에 영화감독 다르덴 형제의 '내일을 위한 시간'이란 영화를 보았다. 관객들의 호평을 받았던 '자전거 탄 소년'을 볼 때는 사실 큰 감흥이 없었는데, 이 영화는 울림이 남다르다. 아마 일자리를 찾으려 하는 주인공의 처지가 강사라는, 비정규직인 내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아 더 공감을 하며 본 것 같다. 병이 나아서 복직을 앞두고 있던 산드라(마리옹
며칠 전 조화를 선물 받았다. 활짝 핀 꽃 옆에 꽃봉오리들이 대롱대롱 맺혀 있어 정답게 보인다. 그야말로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저 꽃은 피어야 할 자리에 다소곳하게 피어있고 잎 또한 적당한 간격으로 있어야 할 위치에 달려있지 않은가. 봉오리 또한 엄마 꽃 옆에 쪼르르 달려 언제 보아도 제 위치에 잘 맞게 앉았다. 사람들도 이렇게 잘 어우러져야 화기애애하
학창 시절에는 친구들 별명을 참 단순하게 지어 붙였던 것 같다. 이름 가운데 옥자가 들어간 친구는 예쁘건 안 예쁘건 옥상에서 떨어진 메주가 되었고, 명자가 들어간 친구는 여지없이 명태가 되었다. 그 중에는 독특한 별명을 가진 친구가 있었는데 얼마 전에 만난 친구 선옥이다. 어쩌다 보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만났다. 선옥이와 약속한 카페에 앉아 있는데 문
얼굴에 그나마 볼만한 곳이 코이다. 눈은 나이가 드니 눈꺼풀이 처져 가뜩이나 작은 눈이 더 작아 보이고, 눈썹은 원래 희미해서 문신으로 간신히 모양을 잡아 놓았다. 이마엔 벌써 주름이 잡히고, 안색은 창백해서 화장을 안 하고 나서면 꼭 어디 아프냐는 소리를 듣는다. 이런 얼굴에 그나마 오뚝하니 제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 코다. 내 코는 아버지의 코를 닮았다
문득 나뭇잎이 커지는 것을 두 눈으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가 다르게 촘촘해지는 나뭇잎을 보고 있으니 신기하기도 하고 기특하고 해서 요놈들이 어떻게 제 살을 부풀리는지 보고 싶었다. 아파트 앞 가로수가 무슨 나무인가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이팝이다. 저 쌀알이 터지는 순간을 보았으면 싶어서 장바구니를 든 채로 한참을 올려다보다가 돌아왔다. 처음인
결혼을 해서 집을 떠나게 될 때, 큰오빠가 중고등학교 때 쓰던 알루미늄 도시락을 몰래 들고 왔다. 왠지 고향집을 기억할만한 뭔가가 있어야 될 것 같아서였다. 그 몇 해 전 우리 집은 옛집을 헐고 양옥으로 지으면서 집안 세간이며 가재도구를 모두 바꾼 터라 예스러운 물건이란 게 거의 남아 있질 않았다. 화로며 경대며 반닫이며 하다못해 은비녀나 참빗, 반짇고리,
종일 꼼짝없이 집안에서만 지낼 때가 있다. 그때는 미루던 서랍 정리를 하거나 읽고 싶었던 책을 뒤적거린다. 사이사이 음악에 귀를 팔기도 하고 오랜만에 친구 '정옥'이와 전화수다를 떨다가보면 하루해는 금세 미끄러진다. 종종 혼자서 일하고, 책보고, 적당히 위를 채우며 여유를 즐긴다. 어차피 인생은 나 홀로 다방, 마음 가는 대로 느슨하게 고삐를 푸는 여유
봄을 재촉하는 봄비다. 창밖을 보니 꽃밭의 나뭇가지들이 소리를 내며 흔들린다. 바람이 촉을 틔우게 하고 있다. 바람결에 아버지의 옥양목 두루마기자락이 펄럭인다. 그 사이로 아버지의 옛이야기가 스멀스멀 비처럼 베어든다. 내가 태어나기 전 6. 25사변이 일어나던 해라고 들었다. 그때 학생들은 학도병으로 나이가 조금 먹은 사람들은 보국대로 하루아침에 동네에서도
지난해 연말 써 보냈던 글이 책 속에 담겨 돌아왔다. 고등학교 모교 교지다. 20년을 넘게 잠재워놓았던 교지가 복간된 것이다. 늘 그렇듯 목차를 뒤져 내 글부터 읽는다. 필자가 아니라 독자가 되어 내 글을 끝까지 읽고 다른 페이지로 넘어간다. 어쩐지 책맛이 다르다. 오래된 추억의 맛이 달짝지근하고 간지럽다. 고교 시절 나는 3년 내내 학교 교지 편집 위원이
졸업하는 학생들에게 선물을 하려고 필기구를 사러 갔다. 요즘 필기구는 종류나 모양, 색깔이 하도 다양해서 사탕 코너 앞에 선 어린아이처럼 무얼 고를지 망설여진다. 결국 샤프와 형광펜 몇 자루를 들고 나오면서 필기구에 얽힌 몇 가지 추억을 떠올렸다. 지금은 거의 사라져가는 필기구지만 우리는 중고등학교 때 펜과 잉크를 사용했다. 중학교에 입학하여 처음으로 유리
햇살을 받고 올라올 봄나물을 만날 요량으로 집을 나섰다. 동네를 벗어나 도로를 건너고 새로 지은 교회 뒤로 가면 이내 가슴이 탁 트이는 들판이다. 이른 봄나물로는 쑥과 냉이가 으뜸이다. 양지바른 찔레 덩굴 아래 남 먼저 얼굴을 내미는 뽀얀 쑥과 겨울삼동을 버티다가 봄볕에 쌉싸래한 맛과 향을 선물하는 냉이야 말고 봄의 전령사가 아니던가. 그새 논두렁 밭두렁에
봄이 오자 얼었던 꽃밭에 생기가 돌면서 꽃망울이 맺혔다. 내일이면 터질 동백꽃망울을 보니 마음 한 켠에 빗장이 열린다. 산과 들이 변하여도 변치 말아야 될 것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사람의 일이란 알 수가 없다. 세상에는 내 것도 언제나 내 것만이 될 수 없는 일도 더러는 있다. 어느 해 엄마는 동생을 업은 포대기가 내려와도 고쳐 업지도 않고 빠른 걸음으로
냉이꽃 침대에 누워본 적이 있는가. 4월, 성질 급한 냉이는 꽃을 피운다. 비슷한 키로 밭이나 길가에 일제히 피어 있는 것이 마치 하얀 시트를 깔아놓은 침대처럼 보인다. 누워 봐, 내 꽃에 등을 대고 누워서 하늘 이불을 덮고 한잠 자, 세상에서 가장 낮은 헹가래도 쳐줄게. 아! 봄이 왔으니 냉이꽃 침대가 곧 지천으로 진열되리라. 하지만 꽃 핀 냉이는 먹을
'태평'이란 말은 얼마나 태평스러운가. 느릿느릿한 여유로움이 묻어난다. 태평소의 유장한 가락. 한가함을 넘어 살짝 게으른 기미까지 엿보이는 천하태평이란 말. 그러므로 태평성대란 이런 느긋함을 즐길 수 있는 시대 아닌가. 나라에 혼란이 없이 백성들이 편안한 시대. 세상이 크게 평화롭고 융성한 시대. 흔히 중국의 요순시절이 태평성대였다고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