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주실 같은 봄비가 내린다. '입춘'이 지나서 그런지 빗속에서 봄 냄새가 난다. 사분사분 대지를 적시는 빗소리가 봄을 재촉하는 주문 같아 듣고 있으면 마음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다. 이번 비가 그치고 나면 남풍은 온 천지에 연두색 물감을 뿌리며 다가올 것이다. 그러면 나는 텃밭으로 나가 천천히 호미질을 시작할 것이다. 새해가 시작되고 그새 달포나 되었
내가 사춘기를 넘어갈 무렵에는 펜팔이 유행이었다. 텔레비전도 없고 방송매체라고는 라디오가 유일한 벗이었다. 라디오만 있으면 한낮의 편지 사연이나 펜팔의 사연을 심심찮게 듣고 즐길 수 있었다. 그 시절에는 어디서 주소를 얻었는지 이름도 얼굴도 전혀 모르는 군인한테서 군사우편이라는 도장이 팍 찍힌 편지가 날아오기도 했다. 아마 동네 총각이 입대하고 본인들의 뜻
외출할 때부터 머리가 아프더니, 저녁 무렵에는 아예 몸이 절절 끓었다. 화장을 겨우 지우고 침대에 누우니 끙끙 앓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이불을 돌돌 말고 벽을 보고 있자니 문득 '아버지 손바닥이 내 이마를 짚어주면 낫겠는데, 기운이 좀 나겠는데.' 싶으면서 핑 눈물이 돌았다. 딸이 건네준 진통제를 입에 털어 넣으며 우는 듯 웃는 듯 중얼거린다. 흙 속
윤제균 감독의 영화 '국제시장'이 1,000만 관객을 넘어섰다는 소식이 들린다. 2,30대는 '부모 세대를 이해하는 디딤돌'로, 5,60대는 '지난했던 시절에 대한 향수'로, 저마다 영화를 통해 느끼는 소회는 다르지만, 세금과 일자리 문제로 세대 간 갈등이 어느 때보다 증폭된 요즘, 서로 다른 세대를 한 스크린으로 불러들여 눈물을 쏟거나 뭉클하게
새해를 밝히는 도심의 밤거리는 아름다웠다. 사람들이 만든 풍경이 어쩌면 이렇게 예쁘고 화려할 수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반짝반짝 불빛장식나무가 있는 도시는 훨씬 우아하고 운치 있었다. 올해도 저 불빛처럼 반짝반짝 온몸으로 살아가게 해 달라는 마음으로 나무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불빛나무 가까이 다가갔다. 그런데 멀찌감치에서 볼 때와는 많이 달랐
새해를 맞아 연초 해맞이를 갔다. 그리 멀지 않은 토함산으로 정했다. 7번 국도를 올라가다 불국사를 지나 토함산을 오른다. 어두운 새벽인데 해맞이 오는 이들의 다양한 연령대에 놀랐다. 하기야 늙고 젊고 간에 꿈이 없는 이가 없을 것이며, 소원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능선을 따라 발길들로 줄이 뻗쳤다. 그 틈에 나도 끼었다. 따지고 보면 어제 뜨던 해가
빨래를 널다가 나를 보고 배시시 웃는 감홍시 하나를 집어 꼭지를 돌려 따고 빨아먹는다. 씽크대 아래 선반에 등을 구부린 채 엎드려 있는 현미 포대를 쓰다듬고, 냉장고에 기대어 있는 고구마 상자를 습관처럼 열어본다. 무화과가 동동 떠 있는 동치미, 갓김치, 배추김치가 가득한 김치 냉장고를 괜시리 여닫는다. 봄부터 가을까지 손톱 밑에 흙이 끼이도록 일 한 적
그 아이가 처음 우리 앞집으로 온 것은 내가 초등학교 때였다. 여남은 살쯤 되었을까. 아이는 혼자서 우물가 느티나무 밑에 앉아 공깃돌 놀이를 하다가 엉덩이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며 집으로 돌아갔다. 해맑은 눈동자에 윤기 나는 단발머리, 오동통한 얼굴에 볼우물이 파여서 더 귀여운 인형 같은 아이는 가끔 누군가를 기다리듯 먼 데를 하염없이 바라보기도 했다. 그
울산에 온지 벌써 20여년이 훌쩍 지났다. 작은 트럭에 이삿짐을 싣고 태화다리를 건널 때는 겨울이었다. 강물은 뿌옇고, 검은 기름띠가 버짐처럼 번져있었다. 처음엔 복산동 남운 럭키 아파트 뒤편 언덕배기 이층에서 살았는데 윗풍이 심한 집이라 얼마 안 되어 지금의 홈 플러스 근처 주택으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쯤엔 다시 남운 럭키
서울을 비롯해 호남과 중부지방까지 눈 소식이 들린다. 오늘은 울산에도 첫 눈이 내렸다. 나의 유년 시절에도 눈이 많이 왔다. 무수히 내리던 눈을 맞으며 동구 밖까지 강아지와 함께 뛰어다녔다. 그 일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내 머리에는 사시장철 하얀 눈을 뒤집어쓰고 다닌다. 내가 어릴 때에는 긴 겨울밤의 먹을거리는 동치미가 별미였다. 살얼음이 동동 뜬 동치미
잠결에 번쩍 눈을 떴다. 창문을 통해 비치는 환한 달빛 때문이었다. 은성한 보름달이 온 집안을 대낮처럼 환하게 비추었다. 잠결에 일어나 팔짱을 낀 채 거실과 베란다를 오가며 한참이나 서성거렸다. 환한 달빛 쪽을 향해 따라가면 금방 달에 닿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고운 빛이 아까워 손바닥으로 받아 모으며 하늘 쪽으로 난 거실 의자에 앉아 밤이 깊도록 달빛만
중학교 1학년 때 내가 다닌 상북 중학교에서는 봄 소풍을 석남사로 갔다. 반질반질한 까만콩 같았던 우리는 가지산 발등께에 흩어져 재재거리며 놀았다. 백일장은 점심을 먹어도 좋다는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시작되었다. 나는 난생 처음 시라는 걸 써보기로 했다. 도시락을 다 까먹고 사이다와 과자, 계란까지 다 먹고 늙은 나무뿌리 위에 앉아 시를 썼다. 계곡에서는
현실이 강팍하다 보니 때때로 '동화 속' 같은 세상을 꿈꾸게 된다. '동화 속의 공주처럼 사랑이 오나 봐. 오늘만은 유리 구두 꼭 맞을 것 같아'라는 노래가사처럼 '동화 같다'라는 말에는 만화나 영화 같다 라는 말보다 순수하고 낭만적인 환상이 느껴진다. 아마 동화가 동심을 지닌 아이들을 위한 문학이고, 대부분의 전래동화가 행복하게 끝나기 때문일
누각 구름이 자주 피어오르던 낭산(狼山)이다. 산허리가 잘록하며 양쪽으로 각각 봉우리를 이루었다. 아침의 안개는 산의 모습을 쉽사리 내보이지 않으려고 낮게 깔렸다. 초입부터 소나무들이 융성하던 역사를 머금은 듯 처연하다. 부드러운 능선을 따라 오르니 선덕여왕의 능이다. 마음을 가다듬어 참배를 하고 능을 돌았다. 아랫부분에는 능을 보호하기 위해 자연석으로 2
남에게 자비심으로 재물이나 불법을 베푸는 일을 보시라고 한다. 험한 세상 내가 이렇게나마 온전히 살아가는 것은 그 누구의 보시 덕분이지도 모른다. 요즈음같이 먹을거리가 풍성한 가을에는 그런 생각이 더 하다. 내가 농사를 짓고 있는 텃밭의 감나무에서 올해도 단감을 수월찮게 땄다. 아삭아삭 달콤한 감 맛에 나무를 향해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옹골차게 달
얼마 전 인터넷 커뮤니티를 뜨겁게 달군 글이 하나 있다. 2년간 일한 아르바이트생이 퇴직금과 주휴수당으로 700만 원을 요구한다는 내용이었다. 자신을 월 100만원 남짓 가져갈까 말까한 서민 편의점주라고 밝힌 글쓴이는 최저임금은 다 지켰다면서, "어처구니가 없어 그날부로 그만두라고 했는데, 어제 노동고용청에서 삼자대면하라고 우편이 날라 왔다. 걔한
대로변 큰 건물에 큼직하게 쓰인 문구가 붙어있다. 눈의 높이에 맞추어 가르친다는 학습지 이름이다. 그것은 아마도 상대방과 동일하게 적절히 같이 간다는 뜻일 게다. 서로에게 편안한 이미지를 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같은 평행선을 맞춘다는 것인가. 하지만 그 높이를 맞추기가 사실 쉽지만은 않다. 눈높이의 단어는 붙이면 한 낱말이지만, 띄어서 읽으면 두 개의 낱말
지금, 나는 문수산 중턱 나무의자에 누웠다. 모자를 꾹 눌러쓰고 깊어가는 가을 풀벌레 소리에 귀를 열어두고 있다. 먼 데서 들려오는 등산객들의 왁자한 소리가 바람을 타고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진다. 떡갈나무, 잣나무, 상수리나무, 솔 향이 바람을 앞세우고 다가왔다가 순식간에 건너편 골짜기로 옮겨간다. 저 아래 들판 어디선가 들려오는 농부들의 풍년가, 풀벌레
내 이름 끝 글자 조자는 한자로 '복 조'자이다. 가끔 이 복 조자가 한자 사전에 없는 '언니복 조자'가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 내게는 언니가 넷 있다. 3, 4년 터울이지만 하나같이 짧은 머리에 파마한 뒷모습이 막 쪄낸 감자처럼 포실포실하니 닮았다. 또 초승달처럼 미끄러진 눈두덩이를 모두 쌍까풀 수술을 했는데 그것도 약속이나 한 듯 닮았다. 나
감자국을 끓이려고 감자 상자에 손을 넣어보니 여름에 샀던 감자 한 상자를 그새 다 먹어 바닥이 보이기 시작한다. 쌀독에 쌀이 떨어져 바닥 긁는 소리가 나는 것처럼 마음이 순간 서늘해진다. 감자를 유별나게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을에 쌀가마를 들여놓고 겨울에 김장을 담가 쟁여놓아야 마음이 푸근해지는 것처럼, 감자 철엔 커다란 감자 상자를 사두어야 좀 넉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