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물체는 오래되면 퇴색한다. 아리따운 꽃들도 시간이 가면 시들어진다. 부부 관계도 그렇게 될까. 오래 전에 본 일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골목길을 사이에 둔 이웃집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불혹의 아주머니가 남편과 함께 시어머니를 모시고 오붓하게 살아가다 모진 병에 걸렸다. 폐결핵이었다. 지금이야 치료가 가능하지만 그때만 해도 완치되기 어려운 병이었다.
'부장님의 유머'라는 말이 있다. 별로 웃기지 않거나, 이미 지구를 한 바퀴 쯤 돌았을 철 지난 유머를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예를 들면 "미스 김이 타는 차가 무언지 아나?" "마티즈? 아니, 모닝인가요?" "땡! 커피라네. 으하하하" 이럴 땐 "부장님의 유머에 무릎을 탁, 치고 갑니다&
친정에 가니 엄마가 쑥국을 끓여 놓고 기다리신다. 한 입 떠먹으니 봄 기운이 온 몸에 퍼진다. 전에는 쑥을 잘 먹지 않았다. 국이나 떡을 해 놓으면 냄새가 강해서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그렇지만 어린 시절 나는 쑥 캐기의 달인이었다. 남들이 쑥이 벌써 나왔을까 할 무렵부터 들을 밟으며 쑥을 캐기 시작했다. 아기 이처럼 작고 여린 쑥을 찾아 온 마을을
삼월이 봄의 시작이라면, 사월은 봄의 절정입니다. 대지는 어디를 가나 기화요초(琪花瑤草)가 어우러져 팡파르를 터뜨리느라 한창입니다. 눈이 부실만치 새하얀 백목련, 고혹적이고 기품 있는 여인의 자태를 빼닮은 자목련, 맑은 하늘 냄새를 풀어내는 핑크빛 진달래, 노랑부리 합창단 개나리가 줄지어 피고 집니다. 모두가 어쩌면 그렇게 오묘하고 조화로운 빛과 향기를 풀
얼마 전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요즘처럼 휴대폰이 없던 시절에는 아이들이 어떻게 약속을 잡고 놀았나요?"라는 질문이 올라온 적이 있다. 그에 대한 답글이 세대에 따라 달라서 흥미롭다. 집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 누구누구 바꿔주세요 하고 약속을 잡는다. 가까운 친구네에 들러 그 애랑 같이 다른 집을 돌며 애들을 모은다. 그리고 또 다른 답
3월,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학교는 일제히 문을 열고 새 선생님, 새 교실, 새로운 친구를 맞는다. 말 그대로 새로운 한 해를 새 마음으로 연다. 교정에는 산수유가 노란 잎을 터뜨리고 봄 학기를 막 시작한 학생들은 여린 봄 순처럼 여기저기 싹을 튀우는 봄이 열린 것이다. 그러나, 고등학교 시절 나는 3월이 싫었다. 오히려 두려움이나 불안감이 나를 엄습했다
몇 해가 지난 일인데도 내 기억 속 창고에는 그날 보았던 TV 속 화면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태극기를 덮은 망자의 시신이 연화장 화장로 8번으로 들어갈 때 그녀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남편을 떠나보내는 아내, 아버지와 이승을 마지막으로 이별하는 아들과 딸의 눈물로 화면이 가득 찼다. 전직 대통령이었던 노무현 님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시골 촌부의 소박한
아프리카의 전래동화에 따르면 원래 이야기는 하늘의 신 니얌의 것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거미인간 아난시가 니얌이 요구하는 네 가지, 그러니까 비단뱀 오니니, 표범 오제보, 말벌 모보로, 요정 모아티아를 구해다주고 대신 이야기를 얻어 내려왔다고 한다. 아난시가 '이야기'를 가져다 인간에게 전해준 이야기는 인간에게 불을 구해다준 프로메테우스를 떠올리게 한다.
봄이 겨울 강을 건너오고 있다. 바람 속에는 부드럽고 온기에 찬 생명의 태동이 느껴진다. 개나리와 진달래, 목련의 꽃눈을 간질이고 침묵에 든 대지를 흔들어 깨운다. 봄바람의 유혹에는 온갖 것들이 깨어난다. 언 땅을 헤집고 나오는 씨앗, 낙엽 밑이나 응달에서 겨우내 숨죽여 지내던 곤충의 미세한 알들이 그가 전하는 말을 귀담아듣는다. 얼어 지내던 내 감성의 속
작가가 되고 참 많은 글을 써서 세상 속으로 날려 보냈다. 내 마음 속에 저장된 아름답거나 아프거나 잊지 못할 것들은 모두 글이라는 옷을 입혀 떠나 보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이야기는 아직 글로 적지 못했다. 스물여덟에 나는 서울에 있었다. 출판사 편집부 직원이었다. 장충동 태극당 앞에서 친구를 만나고, 대학로 밀다원에서 샘터 담벼락을 기어오르는
지난해 말, 협동조합에 관한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그때 강사 한 분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소규모 봉제공장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모여 협동조합을 만들고 필요한 물품을 공동 구매하고 공동의 브랜드를 개발해 공동 판매하기로 한 실제 사례. 그들이 모여 맨 처음 구매한 물품은 무엇일까? 원단? 실? 단추? 놀랍게도 봉제공장 사장(이라 쓰고 근로자겸이라고
일을 하다가 요즘 잠시 쉬고 있는 중이다. 여유는 마음까지 느긋하게 만든다. 바쁠 때는 미처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전에 가지지 못했던 생각들이 한 가지씩 기지개를 켠다. 어제는 거실 한쪽에 정물처럼 놓여있는 누런 호박에 눈이 갔다. 두어 달 전 시골에서 가져온 것이다. 저대로 두면 썩어서 버릴 것이 뻔했다. 어머님이 챙겨 주시면 뭐든 마다하는
아들이 군에서 제대하던 날이었다. 오전 9시에 '제대증'을 손에 거머쥔 아들은 단거리 육상 선수처럼 한달음에 달려 나왔다. 준비된 간편복으로 대충 갈아입은 뒤 선걸음에 인천 국제공항을 향해 내달렸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탑승 절차를 밟은 뒤 오후 1시에 이륙하는 캐나다행 비행기 탑승 대열에 섰다. 불과 몇 시간 만에 먼 나라를 향해 하늘을 날고 있었던
요즘 화두는 단연 '안녕들 하십니까'인 것 같다. 고려대학교 대자보에서 시작된 '안녕'에 대한 질문은, 넘쳐나는 사회 문제와 갑자기 추워진 날씨, 오랜만에 등장한 전지를 가득 메운 손글씨 때문인지 울림과 파장이 예사롭지 않다. 아니, 한때 낙양의 지가를 올렸던 '아프니까 청춘이다'에 대한 젊은이들의 직접적인 답과 같은 형태라서 관심이 집중되고 있
열차 밖으로 눈꽃이 흩날린다. 차분히 내리는 숫눈이 아니라 하얀 가루를 한 움큼 쥐었다 바람 앞에 손바닥 편 듯 눈은 종횡무진 내린다. 서울역 주변 나무들은 마지막 단풍 몇 개씩 품고 속수무책 눈을 맞고 있다. 그걸 내다보며 첫눈의 추억을 떠올리는데 반짝, 서쪽 창으로 햇살이 비친다. 동쪽 창밖으로는 여전히 가는 눈발이 바람에 불리어 가고 서쪽 하늘에는 설
거인처럼 커다란 양철곰이 있다. 양철곰은 마지막 섬처럼 남은 녹지로 불도저와 포크레인이 달려드는 것을 두 팔을 벌려 막아선다. 그 사이 작은 새떼들이 양철곰의 몸 안으로 씨앗과 열매를 부지런히 집어넣는다. 마침내 개발에 밀려 도시는 거대한 콘크리트더미로 변하고 마지막 녹지도 사라진다. 지구에서 더 이상 살지 못하게 된 사람들은 우주 열차를 타고 미지의 허공
낯익은 청년이 문을 열었다. 몇달 전 우리 가게에서 휴대전화를 개통한 청년이었다. 전화를 개통하던 날, 전산상의 문제로 시간이 지체됐다. 제법 긴 시간동안 가게에 머물렀던 청년은 군에서 갓 제대를 했다고 했다. 육군 장교 출신인 남편은 군 복무를 끝낸 청년이 대견한지 이것저것 물어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작은딸과 동갑이라 남편이 무척 살갑게 대해 준 청년이
새벽에 일어나 책상에 앉으니 어깨가 서늘하다. 얇은 윗옷을 찾아 어깨에 걸치고 달력을 보니 해 놓은 일도 없이 어느새 상강을 지났다. 참 빨리 멀리도 흘러왔구나 싶다. 바람도 지나간 후에야 바람이 보인다더니 계절도 인생도 그런가. 가을의 마지막 절기 상강을 지나고 보니 비로소 나를 스쳐간 시간들이 보인다. 손가락 사이로 흘려보낸 시간이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바람의 감촉이 서늘해진 걸 보니 이제 완연한 가을이다. 가을과 가장 어울리는 낱말을 꼽으라하면 '스미다'가 아닐까 한다. 스미다. 속까지 배어들다. 화선지에 먹물이 스미다/ 바람 따위가 흘러 들어간다. 찬바람이 문틈으로 스며든다/ 마음이나 정 따위가 담겨 있다. 편지 속에 어머니의 따스한 사랑이 스며있다/ 절실하게 사무치다. 가슴에 스미는 외로움. 이런
어느 새 가을이다. 고장 난 난로같이 달아오르기만 하던 여름해는 물러앉고 그 자리에 가을달이 무심히 떠 있다. 말라있던 마음 한 귀퉁이로 가을이 스며드는지 사방 쯧쯧쯧 풀벌레 소리로 가득 찬다. 어찌 들으면 노래 같고, 어찌 들으면 울음 같고, 어찌 들으면 뜨거운 대화 같은 저 소리를 나는 여름을 견디며 얼마나 그리워하였던가. 그 매운 찜통 속에서도 삽상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