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오후 6시 55분께 울산 남구 삼산동 농수산물도매시장 인근 한 가게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유은경기자
견훤에 의해 왕위에 오른 신라의 마지막 임금 제56대 경순왕(敬順王)은 숨진 경애왕의 장례식을 치루나 수호 동맹국인 고려 왕건은 신하만 보내 조문을 했다. 봄이 되자 왕건이 뒤늦게 조문을 와서 무려 열흘간을 머물며 선물도 전하며 긴 이야기를 나눈다. 그가 돌아간후 935년 봄 경순왕은 국운을 내건 큰 결심은 내린다. 왕은 신라 사직 1000년을 접고 고려 왕건에게 항복하며 나라를 넘기려 한다. 장자 마의태자(麻衣太子)가 반기를 들며 개골산(皆骨山, 금강산)에 들어가 평생 마(麻)로 된 옷만 입고 살았다. 신하들과 고려 수도 개성에
경애왕이 견훤에 의해 숨지자 왕의 이종사촌이자 헌강왕 외손자인 김부(金傅)가 왕위를 계승해 신라 마지막 임금 제56대 경순왕(敬順王)이 된다. 장창호 작가는 대야성을 무너 뜨리고 단숨에 신라 심장부 포석정까지 쳐들어간 견훤의 의기양양한 기세를 연기한다. 견훤이 경애왕 왕후와 첩들에게 능욕을 보이더니 분통해 하는 경애왕에게 죽음을 맞게한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본 김부는 신라 왕실을 능멸하는 견훤의 모습에 분개해 한다. 견훤의 포석정 기습공격은 경애왕이 형 경명왕에 이어 친 고려 정책을 강화하며 왕건 편을 들자 벼르고 있던 천하의 요새
신라 경명왕이 일찍 숨지자 동생인 상대등 위응(魏膺)이 제55대 경애왕(景哀王)이 된다. 경명왕에게 아홉자식이 있었으나 아무도 왕위를 맡으려 하지 않았고 물려 주려 하지도 않았다. 풍전등화 같은 나라의 운명 앞에 경애왕은 고려 왕건에 의존하며 후백제를 견제하려했다. 고려에 볼모로 있던 견훤의 외조카 진호(眞虎)가 갑자기 죽으면서 고려와 후백제의 화친은 깨진다. 견훤은 인질로 있던 왕건의 사촌 동생 왕신(王信)을 죽이고 군사를 동원해 웅진(熊津)까지 진격했다. 후백제와 고려가 다시 대립하자 경애왕은 고려로 사신을 보내 후백제와 적극적
신라 제8대 아달라 이사금의 후손으로 박씨 왕조를 되찾은 신덕왕(神德王)의 태자 승영(昇英)이 왕위에 올라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이 되었다. 패망의 길로 접어든 신라 말기 왕위에 올라 8년간 재위했다. 왕건이 폭정을 일삼은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高麗)를 세웠다. 그러나 지방 호족들이 고려에 등을 돌리자 왕건은 그들을 회유하기 위한 유화책을 편다. 특히 상주에서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가 아들 견훤과 관계가 틀어지자 왕건에게 투항했다. 신라에 대한 야심이 가득찬 후백제 견훤은 대야성을 점령하고 신라로 진격하자 경명왕은 고려에 원병을 요
올해는 반구대 암각화가 세상에 드러난지 50주년 되는 해이다. 반구대 암각화는 1971년 크리스마스날 마을 주민의 제보로 문명대 동국대 명예교수가 이끈 학술 조사팀에 의해 처음 알려졌다. 1995년 6월 제285호 국보로 지정되기까지 발견 이후 24년간 우리는 반구대 암각화의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프랑스 한 매체에서 인류문화 원형을 간직한 바위 그림을 새긴 반구대 암각화가 소개되면서 세계가 먼저 주목했다. 그동안 암각화는 사연댐으로 물에 잠기며 훼손되고 있었다. 2021년 4월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각석을 품은 울산시 울주군
신라 헌강왕의 서자인 김요(金嶢)가 고모 진성여왕이 스스로 물러난 자리를 이어 제52대 효공왕(孝恭王)이 된다. 헌강왕이 사냥터에서 미모가 뛰어난 여인을 만나 혼외 자식 요(嶢)를 얻게 되었다. 여동생 김만이 작은 오빠 정강왕 왕위를 이어 진성여왕이 되자 뒤늦게 큰 오빠 헌강왕의 혼외 자식을 알게 되고 그의 몸에서 친족 특징을 확인하고 곧 요를 태자로 삼았다. 경문왕 자식인 헌강왕. 정강왕. 진성여왕 등 삼남매가 차례로 왕좌를 이어 갔지만 모두 아들이 없었다. 서자가 왕이 된것은 골품제를 중심으로 왕위에 오른 신라에서는 선례가 없었
헌강왕과 정강왕의 여동생이자 경문왕 딸인 김만(金曼)이 두 오빠에 이어 신라 3번째 여왕으로 등극해 제51대 진성여왕(眞聖女王)이 된다. 작은오빠 정강왕이 만(曼)이가 총명하고 기골이 장부와 같으니 왕위를 잇게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즉위 1년만에 숨졌다. 진성여왕은 선정을 베풀었지만 나라곳간은 바닥이 드러나 있었다. 큰 오빠 헌강왕이 나라의 풍요로움만 만끽하더니 국가 재정이 줄었고 지방호족들은 세금을 내지 않아 관리들을 지방으로 보내 조세를 독촉했다. 12살 나이에 당나라 유학을 떠나 과거에 장원 급제하고 벼슬을 지냈던 고운(孤雲)
경문왕의 맏아들 김정(金晸)이 신라 제49대 헌강왕(憲康王)이 되었다. 헌강왕대에는 자연재해가 없어 해마다 풍년이 들고 기근이 사라지자 백성의 삶도 안정되었다. 서라벌 거리는 초가집은 사라지고 기와집만 가득했고 풍악과 노랫소리가 끊이지 고 밥을 지을때는 장작 대신 숯을 때었다고 전해진다. 김정은 어릴때 부터 영특했으나 왕이 되어 하늘에 내린 풍요에 젖어 가무를 즐겼는데 하루는 포석정(鮑石亭)에서 경주 남산의 신이 나타나 춤을 추자 왕 따라 춤을 추었다. 이 춤을 어무상심(御舞祥審)이나 어무산신(御舞山神)이라고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헌안왕이 두 딸을 남기고 세상을 뜨자 희강왕의 손자이자 왕의 사위인 응렴(膺廉)이 제48대 경문왕(景文王)이 되었다. 조카 문성왕에게 왕위를 물려 받은 헌안왕이 두 공주의 짝을 지어주기 위해 총애하던 국선(國仙) 응렴을 불러 두 딸 중 마음에 드는 딸과 결혼하라 한다. 응렴의 부모는 외모가 예쁜 둘째 딸과 결혼하라 제안하고 응렴의 시선도 둘째 딸에게 향했다. 그러나 스승인 범교사(範敎師)가 둘째 딸과 결혼하면 세가지 손해가 날것이고 맏딸과 결혼하면 세가지 이익이 있을 것이라는 조언하자 응렴은 맏딸 영화부인(寧花夫人) 김씨와 혼인을
제41대 원성왕 증손자인 우징(祐徵)이 해상왕(海上王) 장보고(張保臯)의 힘을 빌려 육촌 형제 민애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라 신라 제45대 신무왕(神武王)이 되었다. 제42대 흥덕왕이 숨지자 왕의 사촌 동생인 균정(均貞)과 5촌 조카인 제륭(悌隆)이 왕위를 놓고 다투었는데 제륭이 숙부 균정을 죽이고 희강왕(僖康王)이 된다. 이때 아버지 균정을 왕위에 올리려다 실패한 아들 우징은 배를 타고 달아나 청해진의 궁파(弓巴)에게 몸을 의탁해 숨어 있었다. 장보고란 이름으로 더 친숙한 궁파는 당나라 서주(徐州)에서 용병 장수로 지내다 흥덕왕 때
헌덕왕이 반란을 일으켜 조카 애장왕을 시해하고 반란을 도운 동생이자 태자인 수종(秀宗)에게 왕위를 넘겨 제42대 흥덕왕이 되었다. 헌덕왕때 부터 통일신라는 급격히 쇠락하기 시작했다. 헌덕왕 이후 왕들은 국정에 대한 비전도 없이 권력만 탐하며 나라를 이끌 리더쉽도 부족했다. 헌덕왕이 즉위하고 극심한 흉년이 들더니 백성을 구휼할 능력도 없어 농민 반란이 일어나고 굶주림에 지친 민초들은 신라를 버리고 당나라로 도망 갔으나 붙잡혀 타국 노비 신세로 전락하는 일이 생겨났다. 왕위 패권 다툼에 패해 명주(溟州, 강원도 강릉)로 물러나 있던 무
신라 원성왕의 손자 소성왕(昭聖王)이 죽자 그의 맏아들 13살인 청명(淸明)이 제40대 애장왕(哀莊王)이 된다. 원성왕의 둘째 아들이자 어린 왕의 삼춘인 언승과 동생 수종이 왕을 대신해 섭정을 했다. 왕의 삼춘들이 실권을 휘두르자 민심이 흉흉해지더니 8월 대보름 추석에 때아닌 흰눈이 내려 서라벌이 적막강산을 이루는 기상 이변이 생기고 세상도 어지웠다. 실권자인 숙부 언승이 어느덧 22살 어엿한 청년으로 자란 조카 애장왕에게 청해진(淸海鎭, 전남 완도)에서 어지러운 국정을 잠시 잊고 쉬고 올것을 권유한다. 애장왕은 미모의 여인과 하룻
신라 혜공왕 때 김지정의 반란군을 물리친 상대등 김양상과 이찬 김경신은 혈맹 동지였다. 혜공왕을 죽이고 김양상이 먼저 왕위에 올라 선덕왕(宣德王)이 되고 그가 죽자 김경신도 왕위를 이어 제38대 원성왕(元聖王)이 되었다. 선덕왕을 이을 유력자는 원래 상재(上宰) 김주원(金周元)이었으나 하필 왕위 승계를 논의하는 날 큰비가 내려 알천(閼川, 경주시 북천)의 물이 불어나 김주원이 입궁을 못하게 되자 왕위 계승 2위인 이재(二宰) 김경신이 왕위를 차지하며 무혈 쿠테타에 성공했다. 이보다 앞서 김경신이 천관사 우물속에 뛰어 드는 이상한 꿈
몸은 남자이나 마음은 여자로 태어난 경덕왕의 아들 건운(乾運)이 8살에 왕이 되니 신라 제 36대 혜공왕(惠恭王)이다. 경덕왕이 태자를 얻지 못해 전전긍긍하다 표훈대사로 부터 딸을 얻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은후 아들을 고집하다 하늘의 순리를 거슬리며 아들을 얻었니 몸은 아들이나 마음은 딸이었다. 경덕왕은 문화정책을 표방하며 불교를 중흥하고 신라의 전성기를 열었음에도 집권 말기에 이르러 귀족과 신하들의 다툼이 잦아지고 끝내 반기를 드는 이도 있으니 반역자와 죄수가 늘어 감옥마저 부족했다. 혜공왕이 왕좌에 오르자 태후 만월부인(滿月夫人
성덕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헌영(憲英)은 형인 효성왕이 아들 없이 숨지자 왕좌에 올랐으니 신라 제33대 경덕왕(景德王)이다. 불국사, 석굴암 등을 지으며 신라 불교 문화의 꽃을 피운 경덕왕은 삼모부인(三毛夫人)과 결혼해 아들을 얻지 못하자 왕비를 출궁시키고 만월부인(滿月夫人) 김씨를 새로운 왕비로 맞아 들인다. 하루는 왕이 신하들에게 위의(威儀)가 있는 승려(영복승榮服僧)를 찾아 모셔오라 하니 때마침 경주 남산 삼화령(三花嶺)에서 미륵부처에께 차 공양을 마치고 돌아오던 스님 충담사(忠談師)와 마주하게 된다. 충담스님은 화랑
성덕왕(聖德王)의 두번째 아들 승경(承慶)이 16살에 왕위에 오르니 신라 제34대 효성왕(孝成王)이다. 외조부 김순원(金順元)이 자신의 딸을 효성왕의 왕비(혜명왕후 김씨)로 삼고 권력을 키워 나가자 다른 왕비의 세력과 암투가 생겨 귀족 간의 권력 갈등과 반란으로 확대되었다. 또 지진, 유성 출현, 핏빛으로 물든 강물, 월성(月城)에 나타난 여우의 울음 등 여러 가지 변고에 관한 기록도 남아있다. 즉위 6년만에 효성왕은 숨지고 유언에 따라 화장돼 유골은 동해에 뿌려져 왕릉이 없다. 선대왕인 증조할아버지 문무왕 처럼 죽어서 왕릉을 세우
지난 11일 울산시 울주군 서생면 진하해수욕장에서 '제1회 서생포 메레치 후리소리 시연회'가 열렸다. 울주문화원과 서생포 메레치후리소리보존회가 마련한 이날 시연회는 서생포 일대 멸치 전통 어업방식을 재현한 것으로 멸치잡이 어선이 들어오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 함께 그물을 끌어 당기는 '후리질'과 힘든 바닷일을 잊고 그물질 호흡을 맞추기 위한 '후리소리'를 복원해 보여 주고 있다. 보존회는 후리질과 후리소리의 유.무형 콘텐츠를 지키고 '부산 다대포 후리소리'와 같이 무형문화재 지
신라 제33대 성덕왕 때 순정공(純貞公)이 아슬라주(강원도 강릉) 태수로 발령 받아 가던 길이었다. 해변에서 점심을 먹는데 주변 바위산 절벽이 병풍 처럼 둘러진 곳(삼척 남화산)에 예쁜 철쭉 꽃이 피어 있었다. 순정공의 아내 수로부인(水路夫人)이 그꽃에 반해 꽃을 꺾어 오기 바라나 길을 따르던 사람 모두가 험준한 벼랑 기세에 엄두 조차 내지 못한다. 때마침 새끼를 밴 암소를 끌고 가던 한 노인이 그 말을 듣고 꽃을 꺾어 주면서 노래(헌화가獻花歌)를 지어 함께 바쳤는데 이러했다. 【 "자주빛 바윗가에 잡은 손 암소 놓고 / 나를 아니
신문왕의 둘째 아들이자 효소왕의 동생인 신라 제33대 성덕왕(聖德王)은 36년간 통치하며 신라의 전성기를 누렸다. 당시 양귀비에 푹 빠진 당나라 현종(玄宗)은 삼국통일로 악화된 신라와 외교를 개선해 신강국 발해의 영토 확장을 저지해야 했다. 신라도 영유권(패강浿江 이남의 땅)을 인정 받고 당나라의 선진 문물을 받아 들였다. 당나라에 유학생을 보내고 국학(國學)에서 유학(儒學)을 장려해 나라의 틀과 제도를 넓혀 나갔다. 어느날 신라의 왕궁에 추문이 나돌았다. 궁궐에는 두 왕비가 있었는데 낮에는 왕비인 대소왕비(성정왕후 成貞王后)가 있
신라 제32대 효소왕(孝昭王)때 화랑 죽지랑((竹旨郎)은 향가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의 주인공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죽지랑은 젊은날 화랑 김유신의 맞수였으나 성장해 삼국통일 전선에 부사령관으로 활약하며 김유신 오른팔로 여러 전쟁을 치뤘고 진덕여왕 부터 신문왕까지 4대에 걸쳐 재상을 지내며 왕을 보좌했던 통일 영웅이다. 삼국통일은 신라의 많을 것을 바꾸었다. 진골도 왕위를 승계할수 있게 되자 권력 다툼은 더 치열해졌고 왕족과 귀족들의 암투도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 신문왕의 장인 김흠돌 난을 계기로 화랑제는 존폐 위기에 처한다. 화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