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오후 6시 55분께 울산 남구 삼산동 농수산물도매시장 인근 한 가게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유은경기자
문무왕의 맏아들 정명(政明)이 왕위를 이으니 신라 제31대 신문왕(神文王)이다. 재위 기간 12년 중 삼국통일에 힘쓴 공신들은 힘이 커지자 견제하며 왕권 강화에 집중했다. 특히 즉위후 한 달만에 반란을 일으킨 장인 김흠돌(金欽突)을 처형하고 왕비 김씨도 출궁시켜야야만 했다. 외세에 맞서 힘을 합쳤던 귀족들이 삼국통일후 왕실 저항 세력이 되자 고구려.백제.말갈인들을 포용하며 군사력을 장악했다. 신하들에게 직무의 대가로 논.밭을 주던 녹읍(祿邑)을 없애고 재임 기간만 토지의 조세를 받을수 있는 관료전(官僚田)으로 전환했다. 귀족들이 군
무열왕의 태자 법민((法敏)은 일찍 전장터에 뛰어들어 삼국통일을 매듭지으니 신라 제30대 문무왕(文武王)이다. 태자 법민은 백제 사비성을 무너트리고 의자왕의 태자 부여융(扶餘隆)을 땅에 꿇어 앉히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꾸짖었다. "예전에 너의 아비가 나의 여동생(김고타소)을 억울하게 죽여 옥중에 묻은 적이 있다. 나로 하여금 20년 동안 마음이 아프고 골치를 앓게 했는데 오늘 너의 목숨이 내 손 안에 있구나!" 일갈하자 태자 융은 엎드린채 아무말이 없었다. 백제를 멸한 이듬해 무열왕이 죽자 왕위에 오른 문무왕의 앞날은 험난했다. 당
백제 성왕은 나·제 동맹을 힘입어 한강 하류 옛 수도를 회복했으나 영토를 확장해가던 신라 진흥왕에 다시 빼앗겼다. 성왕은 딸 소비 부여씨(小妃 扶餘氏)를 진흥왕에게 위장 시집을 보내 방심케 한뒤 가야·왜와 연합해 태자 창(昌, 위덕왕 威德王)을 선봉장으로 내세워 신라 관산성(管山城, 충복 옥천)으로 응징에 나섰으나 어이없이 매복해 있던 신라군에 붙잡혀 처형되고 머리는 신라 궁궐 계단에 묻히는 수모까지 당한다. 수많은 날을 절치부심하던 아들 의자왕이 신라 대야성(大耶城, 경남 합천)을 급습해 김춘추 사위이자 성주인 김품석(金品釋)과
신라 무열왕은 목숨을 내건 군사 원조에 나서 어렵게 당나라 태종에게 원군을 받아 철천지 원수 백제를 무너 뜨리려 한다. 부왕인 무왕에 이어 백제 부흥에 앞장 선 의자왕( 義慈王)은 신라의 40여개 넘는 성을 빼앗고는 오만해져 사치와 방탕을 일삼고 왕의 치세가 예전 같지 않더니만 충신의 직언 마저 외면하고 간신들에게 놀아난다. 장창호 작가는 나·당연합군의 침략을 앞둔 의자왕과 신하들의 대화를 극화로 다룬다. 어느날 충신 성충(成忠)이 나·당연합군 공격을 예측하며 뱃길로 기습할 당 수군을 기벌포(伎伐浦, 충남 서천군 장항)에서 막고 육
김춘추(金春秋)는 진지왕의 손자이며 진지왕의 맏아들 용수(龍樹)와 선덕여왕과 자매인 천명부인(天明夫人) 사이에 태어났다. 부인은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文姬)로 문명왕후(文明王后)이다. 춘추는 진덕여왕이 숨지자 상대등 알천(閼川)과 왕위 경쟁 끝에 진골계로 처음 왕좌에 오른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陵)이다. 할아버지 진지왕이 황음(荒淫)에 빠져 폐위돼 두 아들 용수와 용춘(龍春)은 성골에서 진골로 골품이 떨어지는 '족강(族降)'이라는 수모를 당한다. 이에 왕위 계승 서열 밖으로 밀려나고 진흥왕 큰 아들 동륜(
삼국통일의 주역이자 신라 화랑(花郞)의 표상인 김유신(金庾信). 신라 법흥왕에 투항한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 구해왕(仇衡王, 수로왕의 9세 손)의 증손이자 백제에 맞선 관산성(管山城) 전투에서 이겨 성왕을 처형한 김무력(武力)장군의 손자이다. 부친 서현(舒玄)은 진흥왕 아우 숙흘종(肅訖宗)의 딸인 만명부인((萬明夫人)을 우연히 만나 첫 눈에 반했으나 숙흘종이 두 사람의 만남에 반대해 딸을 가두고 못 만나게 하려 했다. 락이 집에 떨어진 어느날 만명은 달아나 만노군(충청북도 진천) 태수로 발령 받은 서현과 함께 떠났다. 이때 진골계 시
진평왕 동생 국반(國飯) 갈문왕( 진안갈문왕 眞安葛文王)의 딸인 승만(勝曼)공주가 신라 두번째 여왕으로 등극해 제28대 진덕여왕(眞德女王)이 된다. 비담의 난 시기에 죽음을 앞둔 선덕여왕이 사촌 여동생 승만에게 왕위를 넘기라 유언을 남긴 것이다. 여왕 등극에 반발해 군사 반란을 일으킨 재상 비담과 염종은 수세에 몰려 명활산성에서 김춘추와 김유신의 정부군에 격렬히 항거하던 어느날 밤하늘에 살별(혜성, 유성)이 서라벌로 떨어져 정부군은 국운을 걱정하며 사기가 크게 떨어지자 김유신 장군이 불을 붙인 허수아비를 대형 연에 매달아 어둠속으로
진평왕의 딸로 신라 최초 여왕에 오른 제27대 선덕여왕(善德女王). 신라 골품제(骨品制)라는 신분제에 따라 성골계만 왕위를 이어가다 진평왕이 딸만 셋이어서 성골계 덕만(德曼)공주가 왕위에 오르니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진다. 북으로 수나라가 멸하고 들어선 당(唐)나라 태종이 중국 문화 황금기를 이뤘고 고구려는 영류왕(榮留王) 그리고 백제는 무왕(武王)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다. 진평왕은 일찍 후계 구도를 짜기 위해 선왕이자 숙부인 진지왕의 두아들 중 큰아들 용수(龍樹)를 천명공주와 작은아들 용춘(龍春)은 덕만공주와 각각 혼인을 시킨다.
진지왕의 조카이자 진흥왕의 손주인 신라 제26대 진평왕(眞平王)은 허무하게 숨진 태자 동륜(銅輪)의 맏아들이다. 삼국유사에는 정란(政亂)과 황음(荒淫)을 이유로 나라 사람들이 진지왕을 폐위시켰고 진평왕이 하늘로부터 ‘천사옥대(天賜玉帶)’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진평왕이 왕위에 오르기 까지 진흥왕의 두 아들인 형 동륜(銅輪)계와 동생 사륜(舍輪 혹은 금륜 金輪, 진지왕)계의 권력 암투가 있음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화랑세기에도 법흥왕에서 진흥왕. 진지왕 그리고 진평왕까지 의문의 여인 '미실'이 국정을 농단한 기록이
신라 제25대 진지왕(眞智王)은 정복군주 진흥왕의 둘째 아들 사륜(舍輪, 금륜 金輪)으로 삼국통일 위업을 이룬 무열왕계(武烈王系)의 시조이다. 형인 태자 동륜(銅輪)이 일찍 죽어 13살 동생 사륜이 왕위를 이었다고 삼국사기는 전하지만 필사본 화랑세기(花郞世記)는 부왕의 후궁 보명궁주와 밀애를 즐기려 담을 넘다 개에 물려 죽은 과정을 자세히 전한다. 필사본 화랑세기에만 등장하는 의문의 여성 '미실(美室)'이 주축이 돼 태자 동륜을 죽음으로 내몰고 동생 사륜을 왕좌에 앉혔다는 정변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태자의 동
큰아버지이자 외할아버지였던 법흥왕(法興王)이 죽자 7세에 왕위에 오른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王, 삼맥종 三麥宗). 울산 천전리각석과도 인연이 깊은 있는 인물이다. 각석에 새겨진 명문(銘文)에 드러난 원명(原銘) 중 진흥왕의 아버지 '입종갈문왕(법흥왕의 동생 : 사부지갈문왕)'의 이름이 남아 있고 추명(追銘)에는 외할머니 '보도 부인 (保刀夫人)'과 어머니 '지소부인 김씨(只召夫人金氏)' 도 이름을 새겨 서석골(書石谷)에 다녀간 흔적을 남겼다. 눌지 마립간(백제 비유왕 毗有王)기 부터 백
소지 마립간에게 아들이 없어 6촌인 지증왕(智證王 : 지철로왕 智哲老王)이 64세 나이에 왕위를 이었다. '거서간'에서 시작된 신라 시호(諡號)를 '왕'으로 처음 사용한 것이 지증왕 부터이다. 그는 왕이란 시호의 허울뿐인 위엄만 갖춘게 아니었다. 전쟁 위기 마다 주변국 눈치를 살피고 태자를 인질로 보내는 수모를 당하며 군사 원조를 받았던 국가의 무너진 자존심을 세웠다. 그리고 서라벌(徐羅伐), 계림(鷄林), 사로국(斯盧國) 등 혼용 되던 국호도 '신라(新羅)'로 바꾸고 훗날 벌어질 한반도
경주 남산동 남산 기슭 통일전 옆에 작고 아담한 연못과 정자(이요당 二樂堂)가 있다. 특히 한 여름 연잎이 가득한 못 주위를 따라 배롱나무 분홍빛 꽃이 만발하고 솔숲 운치도 좋아 밤낮 없이 사람 발길이 모인다. 정월 대보름날 오곡밥을 지어 먹는 유래가 있는 사금갑 설화(射琴匣 說話)속의 못, 서출지(書出池)이다. 신라 눌지계의 마지막 왕인 신라 제21대 소지(炤知) 마립간 (비처왕 毗處王) 때 북으로 고구려. 말갈 등 외세 침략이 잦아 적국 백제와 동맹을 맺었으나 하늘도 저버렸는지 자연재해 마저 끊이질 않는다. 장창호 작가는 금성에
신라 제18대 실성(實聖) 마립간. 키가 무척 크고 명민하고 지혜로왔다고 한다. 장창호 작가는 실성마립간 편에서 먼저 경주 황남동 대릉원의 합장릉인 황남대총 피장자로 추정되는 내물마립간에 대해 앞서 언급한다. 내물 마립간때 외세의 침입이 잦았다. 백제 근초고왕이 왜와 연합해 자주 침범하자 고구려 광개토왕에 도움을 청한다. 이때 내물 마립간은 조카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 401년 9년만에 신라로 돌아와 왕위에 올랐으나 내물왕에 대한 원한이 남아 있었다. 결국 왜와 화친을 맺으면서 내물 마립간의 아들 미해왕자(미사흔)를 볼모로
고구려 장수왕으로 부터 보해왕자(복호,卜好)를 구해낸 양산 태수 박제상은 미해왕자(미사흔, 未斯欣)를 구하러 울산 율포(栗浦)에서 출발해 왜국으로 향한다. 박제상은 일본 왜왕에게 눌지왕이 아버지와 형을 죽이고 자신 마저 죽이려해 바다 건너왔다고 속이려하나 왜국의 의심은 풀리지 않았다. 이때 신라에 숨어든 일본 첩자들에게 신라왕이 미사흔과 박제상의 식솔들을 모두 가두었다는 정보가 들어 온다. 박제상의 숨은 계략이었다. 미해왕자를 은밀히 신라로 향하는 배를 띄우고 자신은 왜국에 잡혔다. 왜왕은 "왜 나라의 신하라고 말한다면, 높은 벼슬
신라 제19대 눌지(訥祗) 마립간(麻立干) 때 선대 왕이자 당숙인 실성(實聖) 마립간은 눌지 마립간의 동생 보해(복호,卜好) 왕자를 국교을 맺은 고구려(장수왕)에 볼모로 보내 버렸다. 눌지왕도 잦은 침략을 일삼던 왜국과 화친을 맺으며 미해(미사흔 未斯欣) 마저도 볼모로 잡혀 가버렸다. 이때 양산 태수 박제상이 근심에 젖어 있던 눌지왕을 위해 고구려와 일본에 볼모로 잡혀 있던 두 동생을 구해 내고 자신은 일본 왜왕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잔인한 죽음을 맞이한다. 고구려에서 보해왕자를 먼저 구한 박제상은 부인과 딸의 얼굴도 보지 않고 왜국
지난 17일 정의당의 경남도당과 양산시위원회는 양산시청 앞에서 기자회견 열고 김일권 양산시장 소유 농지 앞 하전제방 도로를 적법한 절차를 밟지 않고 진입도로로 지정했다며 관련 의혹을 감사 청구를 진행한다고 밝혔다. 이수천 기자 ▶관련기사 보기 #김일권양산시장 #감사원감사청구 #정의당
신라 고분들이 집중적으로 모인 경주 황남동 대릉원에는 가장 큰 황남대총과 천마총 등 전체 23기의 능이 한 곳에 모여있다. 최근 경주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황리단길과 인접해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이 대릉원 정문 입구에서 들어가다 처음 만나는 작은 능이 있는데 김알지의 7대 손으로 김씨 왕 시조(始祖)인 미추(未鄒) 이사금의 능이다. 능 북향에 다른 능에서는 볼수 없는 작은 대숲은 제14대 유례 이사금 때 이서국(경북 청도 고대국가) 군사들이 금성(金城 : 경주)에 쳐들어 오자 댓잎(대나무 잎)을 귀에 꽃은 병사들이 나
신라 전기 마지막 박씨계 왕인 제8대 아달라(阿達羅) 이사금 때 동해 바닷가(포항 영일만 호미곶)에 연오(延烏)와 세오(細烏) 부부가 살았다. 어느날 남편 연오가 바다에서 해초를 따다 어떤 바위에 실려 일본(도기야 都祈野 : 해돋이의 뜻)으로 떠내려 갔다. 그리고 이른 곳의 사람들이 그를 받드니 일본 변방에서 왕이 되었다. 돌아 오지 않는 남편을 찾던 아내 세오는 연오가 벗어 놓은 신발이 있는 바위에 올랐는데 역시 실려 일본에 이르니 남편과 재회 하고 귀비(貴妃)가 되었다. 이후 계림(신라)은 해와 달을 잃어버려 임금이 일관(日官)
탈해왕 때 금성(金城) 서쪽 시림(始林) 수풀에서 닭 울음 소리가 들려 가보니 나뭇가지에 금궤(金櫃)가 걸려 있고 그 속에서 사내아이가 있었다. 이에 아이의 성을 '김(金)'이라 하고 이름은 '어린아이'란 뜻의 '알지(閼智)'라 불렀다. 이후 시림은 계림(鷄林)이라 불렸다. 김알지는 신라로 유입된 알타이계 북방민족(흉노족)이란 속설이 지배적이다. 이주민족 출신이었던 김알지는 6대에 걸쳐 신라에 뿌리 깊게 내리며 7세손 미추(味鄒) 이사금에 이르러 처음 김씨가 왕위에 올랐다. 신라 99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