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여둔 그릇들을 꺼냈다. 졸망졸망한 것들을 언제 다 사다 모았는지 부엌 바닥에 가득하다. 한때는 자주 부려먹던 것들이다. 추억까지 담긴 식기류들이지만 이제는 대부분 버려질 것 같다. 그릇들의 컬러가 민무늬나 흰색이 대부분이다. 화려한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주로 사들인 그릇들은 독특한 것들이 없다. 가끔은 호기심에 샀던 것들이 여러 종류의 그릇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겉돌고 있다. 이제 나는 살림에 젬병인가 보다. 주부들은 예쁜 그릇을 보면 감탄사를 연발하거나 그릇 사는 재미도 쏠쏠하다는데 그런 재미는 고사하고
얼마 전 퇴근길, 병영농협에서 지인 한 분을 만났다. 볼이 들어가 보일 정도로 살이 빠졌길래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다 멈칫하곤 몸이 가벼워 보인다고 했더니 여간 좋아하지 않으셨다.사실 그분은 평소 몸에 예민한 편이라 말을 돌렸던 것이다. 뜻밖에 좋아하던 군것질을 아예 끊었다며 즐겁게 털어놓았다. 순간 모 일간지에 실렸던, 고문에 피골이 상접한 도산 얼굴이 스쳤지만 서로의 안부만을 챙기며 병영사거리에 닿을 즈음이었다.웬 중년 남녀가 불쑥 가로막더니 다짜고짜 "반일 감정 조장하는 문×× 탄핵하자"며 "문×× 하야 1,000만서명운동"에
블라디보스토크는 요즘 각광받는 여행지다. 십여 년 전부터 '가장 가까운 유럽'이라는 별칭으로 찾는 사람이 늘기 시작하더니, 마침 한일 경제 분쟁의 여파로 일본 여행을 취소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발길을 돌린 사람이 많아서인지 넓은 벌판에 대형 마트처럼 자리 잡은 작은 공항엔 한국 여행객들로 넘쳐난다. 여행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아르바트 거리다. 모스크바의 아르바트 거리를 본 따 만든, 분수대를 중심으로 찻집과 상점들이 늘어선 아름다운 거리로 야외 공연이나 모임이 많은 곳이다. 각종 놀이시설이 있는 해양공원, 금각만을
제법 떨어진 곳에서부터 민망한 듯한 웃음을 띠고 나를 찾아오는 사람. 어쩌다 들르지만 스스로 우리 가게의 주요 단골로 생각하는 고객이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처지가 된 듯 평소의 당당하던 기세가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궁색한 이야기를 하자니 자꾸만 말이 늘어지고 본론이 겉돌아 애가 타는 듯하다. 적절한 순간에 말꼬리를 잡아주었다. 반색을 하며 돈 오천 원을 빌려달란다. 꼭 갚아주겠다며 차비를 잊고 나왔다고 했지만 속사정은 안과 치료비로 짐작이 되었다. 그녀는 당뇨합병증으로 안과 치료를 받는 중이란 이야기를
파란 호수 위로 물비늘이 반짝거린다. 달아오른 팔월의 열기가 아직은 후끈하지만, 산빛을 품은 저수지의 물결이 갈바람에 물이랑을 짓는다. 잠겨 있던 '남생이 바위'가 형체를 보일 만큼 가물어도, 나그네의 가슴을 풍덩실 적셔주는 오어지다.운제산 계곡을 막아 만들어진 오어지에는 재미난 설화가 전해진다. 신라시대 원효대사와 혜공선사가 이곳에서 수행을 정진할 때였다. 법력으로 계천에서 물고기 두 마리를 잡아먹고 생환토록 뼈를 방면했는데, 한 마리는 물속으로 사라지고, 다른 한 마리는 물 위로 힘차게 떠올랐다. 이를 본 두 스님
신랑 신부가 마주 보고 섰다. 방글방글 미소를 띠고 새신랑을 쳐다보는 신부의 눈빛은 솜사탕이 묻은 듯 달콤해 보인다. 신랑은 화답 대신 이르게 핀 오월 목단처럼 연신 벙글댄다. 신랑 신부 사이에 꼭짓점처럼 서 있던 주례사가 찬물을 끼얹듯 그들의 미소를 돌려세운다. 짧을수록 좋다는 주례사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축축 늘어져 긴 결혼 생활의 고단함을 미리 예견하는 듯하다. 사랑과 행복만 가득할 거라는 설렘을 안고 언약 서를 읽는다. 신랑은 보증도 담보도 쓰지 않겠단다, 비위 약한 아내를 위해 분리수거도 자청한다, 아침밥 해주겠다는 신부
햇살이 비껴 내리는 오후다. 아버지 혼자 신문을 보고 계신다. 나는 아버지 옆에 슬며시 앉는다. 떨어져 있던 식구들이 다 모이다 보면 아버지와 단둘이 이야기할 시간이 여의치 않다.아버지는 칠순이 되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셨다. 새로운 우물을 판다는 것에 약간의 설렘도 있었지만 과연 이 우물에 물이 터질지는 아버지도 미심쩍지 않을 수 없었을 테다. 그래도 친정 나들이를 할 때마다 그림 도구들이 버젓하게 눈에 띄는 게 좋았다.친정에 올 때마다 아버지의 그림이 궁금했다. 처음엔 날로 몰라보게 자라나는 아이처럼 실력도 쑥쑥 자라나는 것이
비바람이 몰아친다. 비닐하우스로 비가 들이치자 실내가 금방 눅눅해진다. 건너편 산은 비가 뒤덮은 지 오래고, 자욱한 안개로 높은 산과 하늘의 경계가 사라졌다. 순식간에 산속의 나무와 풀들이 비바람에 하나가 된다.느슨한 바짓가랑이가 축축해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빗방울이 더 굵어지니 낭패다. 농로가 흙길이라 집으로 돌아갈 일이 막막하다. 비에 젖은 앞산과 마주 앉았다. 내게 비 오는 날의 막막함은 낯선 일이 아니다. 소낙비가 내리는 날 우산도 없이 학교에서 무작정 어머니를 기다리던 그 어느 날처럼…비닐우산마저 귀했다. 우리들은 대부분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이는 ≪삼국유사≫ 권2 신라 48대 경문왕조의 '여이설화(驢耳說話)' 속 복두쟁이의 외침이다. 경문왕은 임금 자리에 오른 뒤 갑자기 귀가 길어져서 나귀의 귀처럼 되었다. 그것을 오직 왕 전속 복두쟁이만 알았다. 그는 평생 그 사실을 감히 발설 못 하다가 죽을 때에 이르러 도림사라는 절의 대숲으로 들어가 대나무를 향하여 그 사실을 외쳤다. 이후 대숲 속으로 바람이 불 때마다 그 소리가 메아리쳤다. 후에 왕이 그 사실을 알고 대숲을 베고 산수유를 심게 했으나 소리는 여전하였다고 한다.이처럼 진실
수업 중에 가끔씩 '나에게 만약 투명 망토가 있다면'이란 글감으로 상상글 쓰기를 하게 할 때가 있다. 그럴 경우 많은 아이들이 '나를 괴롭히는 나쁜 친구를 혼내주겠다'는 반응을 보인다. 나쁜 친구는 도둑이나 깡패와 같은 '나쁜 사람'으로 바뀌기도 하지만 아무튼 아이들은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는' 상황을 사적 응징의 기회로 삼는 편인데, 이런 면에서 아이들의 상상력은 어른보다 오히려 빈약한 듯하다. 어른들의 경우는 단순한 복수가 아닌 범죄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남의
어렵게 나선 길이다. 길도 멀거니 와 무작정 간다고 들어갈 수 있는 곰배령이 아니기에 기회가 쉽게 오지 않았다. 서둘러 왔건만 주차장에는 우리보다 먼저 온 사람들이 대기 중이다. 들머리 절차가 까다롭다. 정확한 시간이 되어서야 사전 예약자 명단을 확인하고 신분증까지 체크한 뒤 들여보내 준다. 하산 시간이 따로 정해져 있음이 못내 부담스럽지만 어렵게 온 걸음인 만큼 기대가 남다르다. 곰배령은 곰이 하늘을 향해 벌렁 누워 있는 형상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해발 천고지가 넘는 산등성이에 얼마나 배짱 좋은 놈이 배를 뒤집고 있을까. 기
아내, 엄마, 며느리, 결혼한 딸을 통틀어 주부라 한다. 주부가 곧 아줌마다. 아줌마이면서 아줌마라는 소리를 싫어라 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결혼한 지 얼마 안 되는 새댁을 보고서 아줌마라 하면 당연히 낯설어 거부감이 들기 마련일 테지만, 결혼 경력 이십여 년이 다가와도, 그보다 훌쩍 넘기고도 싫어라 하는 사람들의 속내를 모르겠다. 아줌마라는 낱말을 좋아한다. 그 안에 든 무궁무진한 힘과 연륜이 돋보이니까. 천장에 붙은 전구 갈기는 물론, 목이 꺾어져라 쳐다보며 갈아야 하는 커튼 봉에 낀 커튼 갈기, 도저히 어찌 옮겼을지 알 수
박 할머니는 작년 늦가을에 스물아홉 손녀를 잃었다. 다섯 살에 뇌종양을 앓았던 후유증으로 말을 잃고 옴짝달싹 못한 채 이십여 년 넘게 누워 지낸 손녀였다. 박 할머니는 집안일과 손녀를 챙겨 먹이는 일에 혼신을 다하다 여든이 되었다. 그 옛날 고등학교까지 나온 데다 꿈이 피아니스트였던 박 할머니는 집안일을 하다가도 손녀를 바라보며 피아노를 치곤했다. 동요도 퐁당퐁당 퍼 올리고 찬송으로 코를 훌쩍이기도 했다. 게다가 품 넓고 웃음까지 많은 박 할머니의 집을 나는 자주 드나들며 이웃사촌이 되었다. 한번은 교회에서 나들이가 있었다. 박 할
붕어 한 마리가 펄떡이고 있다. 낚시에 걸려 춤추듯 요동친다. 제법 큰놈이다. 한 TV 프로그램에서 민물낚시 대회를 벌이는 중이다. 참가자는 프로 낚시꾼도 있고 연예인도 있다. 물고기를 잡은 사람은 전문 낚시꾼이 아닌 연예인이다. 낚시에는 미끼가 없었다. 눈 멀쩡히 뜨고 공갈낚시에 걸렸다. 미끼에 걸리는 것이 비단 물고기뿐이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아름답거나 먹음직스러운 미끼를 의심하지 않고 물기도 한다. 좀 더 나은 삶, 막연한 행복을 위해서도 그렇다. 더 많은 일을 해야 많은 부를 누릴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다. 행복할거라 행각하는
지난 1992년에 나온 명장 로버트 레드포드 감독의 '흐르는 강물처럼'은, 배우 브래드 피트가 스코틀랜드 출신 목사 리버런드 맥클레인의 자녀 중, 자유로운 영혼의 아들 폴로 열연해 필자에겐 무척 깊은 인상을 주었다. 미국 몬태나주 강가 플라이타잉(fly-tying, 제물낚시)을 배경으로 가족 간의 자잘한 일상과 사랑이 잔잔하게 묻어나는 영화였다. 물론 폴의 느닷없는 노상 죽음이 불러온 아버지 맥클레인, 형 노만 등 가족의 고뇌와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지만, 필자가 특히 눈여겨본 것은 비록 사랑하는 사람을 길거
이십 대 때 읽었던 『열하일기』를 오랜만에 다시 읽는다. 하도 오래전 일이라 그때 느낌이 거의 남아있진 않지만 예전이라면 그냥 지나쳤을 법한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예컨대 책의 끝부분에 나오는 사소하지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일화 같은 것. 연암이 열하에서 돌아와 연경에 남아있던 일행과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연암의 큼직한 보따리를 보고 무슨 진기한 물건을 가져왔나 싶어 서둘러 끌러보지만 종이뭉치만 가득한 것을 보고 실망하는 장면이다. 그 두툼한 종이뭉치는 연암이 노정을 기록한 일기와 중국에서 만난 사람들과 나눈 필담들이
며칠간 피로를 몰고 이동하느라 지칠 대로 지쳐 있을 즈음이다. 인솔자가 일정에 없던 발 마사지를 받는다고 안내한다. 언젠가 소통이 불편한 나라에서 무턱대고 발을 맡겼다가 몸살이 난 경험이 있는 나로선 별로 내키지 않는 일정이다. 예정된 코스를 둘러보는 것보다 비용 면에서나 시간 투자에서 기대치를 높여도 좋다는 말에 조용하던 차 안 분위기가 단숨에 생기로 가득하다.버스가 도착한 곳은 도심 속 어느 한 후미진 골목이다. 어두컴컴한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기다리고 있던 아가씨들이 방을 안내한다. 하나같이 젊고 예쁜 얼굴이다. 한 아가씨가
'울산 박 사장'은 아들이 제대하고 난 후 스스로 붙여 준 감투 아닌 감투였다. 아들은 자신의 포부를 대신해 웃고 넘길 수만은 없는 닉네임부터 만들어 자신을 채찍질하는 도구인 양 아는 사람들에게 날려댔다. 제대한 아들은 일부러 대학복학 시기에 맞춰 제대 날을 계산해 입대 날짜를 잡던 그 아이가 아니었다. 군대서 몹쓸 물이 들어왔다며 타박도 했다. 도대체 군에서 무슨 계획을 세워 저렇게도 돈 타령을 할까 싶어 공연히 아들의 군대 생활에 궁금증과 원망이 일기도 했다. 한집에 살면서도 얼굴 보기 힘들 만큼 아르바이트를 하느
무슨 일을 하든지 자유로울 때 사람은 행복하다. 나는 요즘 두 발과 손이 묶인 느낌으로 책을 읽고 있다. 내 안에 도무지 상상이란 게 일어나지 않는다. 독서의 맛은 밋밋하고 감흥이 없다. 마치 마음에 쏙 드는 멋진 이성을 만났지만 감정에 변화가 없는 것과 같다. 불이 붙을 것 같은데 그렇지도 않다. 나 스스로 이런 상황을 자초했으니 할 말이 없긴 하다.얼마 전에 아들에게 갔을 때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천재 화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의 생애와 작품이 실린 『모딜리아니, 열정의 보엠』이었다. 그의 친구 앙드레 살몽이 쓴 책이다.
오랜만에 집에 들렀다. 현관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 안방으로 끌어당겼다. 어린애마냥 환한 웃음을 지으며 장롱에서 액자 하나를 꺼내 보여주었다. 액자 속 사진은 다름 아닌 아버지의 영정사진이었다. 조금은 먼 곳에 시선을 두고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모습이 한참은 젊어 보였다. 깊게 패인 주름은 어디로 갔으며 약간 흐려진 눈빛을 또 어찌 이만큼이나 해맑게 처리하였을까. 아버진 마냥 천진한 아이가 처음 사진을 찍었을 때처럼 자랑을 하였는데, 팔십 년 지나오는 사이사이로 끼어들었을 파란한 궤적들은 보이지 않았다. 꼭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