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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때 울산의 관문으로 지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학성동. 임진왜란의 아픈 상처를 400년 동안 지켜오고 있는 학성공원(앞쪽)과 계변성의 천신이 학을 타고 내려왔다는 학성산(뒷쪽) 사이로 주택가가 밀집해 있다. 김정훈기자 idacoya@


"마을에 밥짓는 연기는 끊어지고 사방 우거진 숲에선 두견새만 슬피 우는구나." 조선 중기 문신인 한음 이덕형이 임진왜란 후 민심수습을 위해 도체찰사의 임무를 띠고 울산에 내려와 격전지였던 학성 일대를 둘러본 뒤 전쟁으로 황폐해진 마을과 백성들이 겪고 있는 고초를 알리기 위해 즉석에서 지은 시의 내용이다. 학성동은 밥짓는 연기가 사라질 정도로 전쟁의 상처가 깊었던 역사현장이었다. 그리고 그 역사의 상흔은 400년이 지난 오늘에도 마을에 남아 전해지고 있다.


왜성이던 학성공원 지금은 주민쉼터로 변모
산업화 한창이던 60~70년대 울산최대 번화가
20여년째 성업 가구거리 울산명물 자리잡아



# 학성동의 유래
고려 명종 때 한림 김극기의 '태화루서시'에는 "천신이 학을 타고 계변성에 있는 신두산에 내려와 사람들의 수록을 관장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고 적었다. 계변성은 신라시대 변방을 수비하던 신령스러운 고을이라는 뜻의 학성의 옛 이름이고, 신두산은 신성한 산임을 뜻하는 것으로 지금의 울산문화방송국이 자리잡고 있는 학성산이다.

 즉, 계변천신이 학을 타고 내려와 고을 사람들의 생명과 재산을 주창하였다고 해 이 곳을 학성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는 '계변천신설화'로 울산의 창읍설화로 되고 있다. 학성이라는 이름은 또 다른 곳에서도 확인된다. 신라 제49대 헌강왕이 울산지역을 순행하던 중 이 곳에 학의 무리가 모여들고 경치가 좋아 왕의 일행이 잠시 쉬어 갔다고 해서 붙여졌다고도 한다.
 
# 전쟁의 상처 아문 학성공원
   
▲ 학성공원에서 바라본 1930년대 울산역사. 역사 플랫폼에서 손님을 태운 뒤 기차가 하얀 연기를 뿜으며 힘차게 출발하고 있다. 역사와 철로 주위로 형성된 지금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의 중구 시가지가 한눈에 보인다.
학성동의 중심에 있는 학성공원은 울산대공원이 들어서기 전 울산을 대표하는 도심 휴식공원으로 외지인에게도 많이 알려졌다. 하지만 한음의 시와 같이 전쟁의 아픔을 그대로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학성공원은 임진왜란 때 왜군 장수 가토 기요마사가 인근 울산읍성과 병영성을 헐어 그 돌로 쌓은 왜성터였다는 것은 시민들에게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지금은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고 일본식의 성벽 일부만 남아 있으나 옛문헌에는 당시 왜군과의 치열했던 전투상황을 그대로 전하고 있다.

 당시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은 이 곳에서 2차에 걸친 대규모 전투를 벌였는데 연합군과 왜군을 합쳐 1만여명의 사상자를 냈던 곳이다. 하지만 1598년 9월 2차 전투 당시 명나라가 군사를 거두어 철수하면서 왜성 함락은 실패하고 말았다. 이처럼 학성전투는 명나라와 연합전술을 펼치면서도 끝내 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우리의 약화된 군사력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씁쓸함을 떨쳐버리기가 쉽지 않다.

 이 왜성이 오늘날의 학성공원으로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사업가였던 추전 김홍조가 울산 사람들에게 제공할 목적으로 이 지역 사유지 7,000여평을 사들여 흑송, 벚꽃, 매화 등 꽃나무를 심어 공원으로 꾸민 후 1913년 울산면에 기증하면서부터다. 그리고 지난 2000년 9월 제2공원 내에 충의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우리 고장 의병들의 충절의 뜻을 기리고, 애국충의사상을 후손들에게 전승하는 산교육장이 되고 있다.
 
# 울산 교통의 중심지
학성동은 울산이 국가공업단지로 지정돼 개발되던 1960, 70년대에만 해도 울산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모여사는 마을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인접한 옥교동과 성남동이 상업동으로 급격하게 팽창하고, 남구에 신시가지가 개발되면서 상대적으로 작은 마을로 변했다.

 철로가 이설되기 전 이 마을의 모습은 동요 '기찻길 옆 오막살이'처럼 한 폭의 동화같은 마을이었다. 1976년 도지구획정리 사업이 시행되기 전에만 하더라도 공원 주위로 논과 밭, 미나리꽝이 대부분이어서 아이들이 기차 지나가는 소리를 들으면서 잠이 들고, 또 깰 정도로 한적한 마을이었다.

 하지만 기찻길 건널목 사고가 잦아 주민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의 학성공원과 길메리병원 앞, 학성초등학교 후문에 있었던 건널목은 등교길 학생들의 사고가 잦았다. 때문에 이 건널목을 지나야 하는 학성초등학교 학생들은 인근 새치마을 옥성초등학교로 전학을 하는 모습이 연출되기도 했다.

   지금은 도로가 개설돼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울산역 광장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국방의 의무를 짊어진 울산의 젊은이들이 모여들어 눈물 젖은 손수건을 흔들며 사랑하는 가족 및 애인과 이별을 나누던 곳이기도 했다. 또 외지에서 울산으로 출퇴근 하는 사람은 매일 울산역 광장을 지나 일터로 나갔다.
 
# 울산 명물, 학성동 가구거리

   
▲ 옛울산역사.
울산에 가구점들이 밀집해 가구거리를 형성하고 있는 곳이 몇 군데 있다. 학성동 가구거리와 역전시장 일원, 동구 화정동 일원과 남구 삼산동 일원이다. 이 가운데에서도 학성동 가구거리는 100여개의 각종 가구점이 모여들어 울산지역 최대 가구거리로 인정받고 있다. 이 가구거리는 1980년대부터 형성되기 시작해 1990년대 들어 각종 가구점이 집중적으로 모여들면서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다. 

 당초 울산지역 가구점은 1960년대 중구 옥교동과 성남동 일원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이후 1970년대 학산동 역전시장 일대로, 1980년대 들어 지금의 학성공원 옆으로 이전을 한 것이다. 이는 울산지역의 가구점이 1960년대부터 10년 단위로 상가의 집단적인 이동현상을 보여줘 가구업의 '10년 주기설'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가구점이 집단으로 한 지역에 모여드는 것은 집적으로 인한 고객유치가 손쉬운 것 등 반사이익 때문이지만 당시 가구점들이 성남동 등 중심가를 거쳐 학산동, 학성동으로 이전을 거듭한 이유는 매장의 임대료 문제에 있었다.

 1970년대 당시 시내 중심가였던 옥교동과 성남동의 급격한 상업타운 발달로 지가가 높아지자 상대적으로 임대료가 낮은 학성동으로 이전했다. 또 학성동이 구획정리되면서 지가도 시내 중심가에 비해 저렴하고, 넓은 매장 마련이 용이해 가구점들의 이전 적지가 됐던 것이다. 이곳의 한 업주는 "학성동 가구거리는 울산의 독보적인 가구타운으로 자리잡았다"며 "학성동 가구거리에 10년 주기설이 재연되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박송근기자 song@ulsanpres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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