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관찰해서 시로 지은 김극기는 울주군 두서면 인보리에 있었다는 '잉불역(仍弗驛)'에 대한 시를 적었다. 울주군 두서면 인보리 전경. 김정훈기자 idacoya@ulsanpress.net

(1)노봉(老峰) 김극기(金克己)

울산은 문풍이 빈약한 곳이다. 예나 이제나 매한가지다. 산 높고 물 깊어 수려한 풍광을 지닌 기름진 들판을 갖춘 고을이었지만, 국토의 동남단에 치우친 까닭에 왜의 침입이 잦았고, 그래서 국방의 요충지였다. 병영이 들어섰다. 은연 중에 무(武)를 좇는 기질이 승하게 됐고, 문풍이 뒤떨어짐을 어쩌지 못했다. 하지만 울산땅을 찾은 외지의 시인묵객은 그 빼어난 자연풍광과 다정다감하고도 넉넉한 인심에 놀라워 했다. 그들 가운데에는 뒷날 나라를 진동시킨 걸출한 문사가 한, 둘이 아니었다. 그들이 울산땅을 노래한 옛글의 향훈은 지금도 천지간에 가득하다. 세월이 흘러 전국 최대의 공단이 자리잡아 수많은 인재가 몰려들었으나, 문풍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고 있다. 울산 사람 모두가 울산을 바로 세우고 제대로 살리는 역사문화가 샘솟는 울산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다. 울산에 문풍이 흥건히 고이게 '울산땅 옛글의 향기'란 연재물을 격주로 싣는다.


울산은 고래로부터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이었다. 아파트단지를 만들거나 공장을 짓기 위해서거나 팠다 하면 나오는 청동기시대의 유적에서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다. 편한 삶터를 찾아 사람이 모여 들면 자동적으로 새로운 문물과 선진 사상이 들어오게 마련이다. 더욱이 신라의 왕도 서라벌에 맞붙어 있는데다, 그 관문이었으므로 불교문화가 찬연히 꽃피었다.

 신라 때에는 곳곳에 거찰이 자리잡았다. 신라 호국불교의 상징 황룡사의 창건설화에 닿아 있는 동축사와 양산 통도사에 버금가는 태화사와 영취사와 혁목사와 반고사와 압유사와 망해사와 취선사와 가슬갑사가 9대 사찰로 꼽혔다.  그 밖에도 운흥사와 장천사와 청송사와 문수사 등이 있었다. 삼국유사의 표현대로 '사사성장 탑탑안행(寺寺星張 塔塔雁行)'이었다.

#대화루시서, 태화루 소재 현존 最古文

 태화사는 황룡사와 통도사와 함께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나눠 봉안한 큰 절이었다. 그 서문루가 나중에 울산의 명승 '태화루'가 되고, 전국에서 몰려온 명사들이 그 풍광을 예찬하는 글을 지었다. 현존하는 글 가운데에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 고려 때의 문인 노봉(老峰) 김극기(金克己)의 글이다. 그는 생애의 대부분을 전국을 떠돌았다. 울산에도 들렀고, 울산에 대한 몇 편의 글도 남겼다.

 김극기가 남긴 태화루 글은 지금까지 파악된 태화루에 대한 107편의 글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다. 태화사 서문루인 원래의 태화루에 대해 쓴 글이다.  '대화루시서(大和樓詩序)'란 제목으로 산문과 시를 함께  썼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2 울산 누정'조에 실려 있는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1930년대 태화루 전경. 노봉 김극기가 둘러본 고려시대 태화루의 모습과 흡사하지 않았을까.
 <계림(경주)으로부터 남쪽으로 하루동안을 물길이 돌고 산길이 바뀌는 곳을 가면 바닷가에 이른다. 그곳에 부(府)가 있으니 흥례부(울산)라 한다.  세상에 전해오기를 '계변천신이 학을 타고 신두산에 내려와 사람의 수록을 관장했다'해서 학성이라고도 한다. 성 서남쪽에 강이 있으니 대화강이라 한다. 길이가 6, 7리나 돼 강물이 질펀하게 출렁이며 흐르는데, 물결은 한결같이 푸르다. 붉은 언덕과 푸른 벽의 그림자가 거울 속처럼 거꾸로 서있으니 마치 고개지(顧愷之)가 사탕수수를 먹듯 갈수록 더욱 좋다.

 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볼수록 경치가 더욱 아름다운 것이 있으니 그것이 용두이다. 용두를 베고 우뚝 일어나 서쪽으로 취봉의 높은 봉우리에 연이어서, 남쪽으로 고래가 노는 바다의 넓고 아득한 물경을 바라보는 것이 대화사다. 그곳 누각에 오르면 마치 그림 병풍에 기대어 아래로 한 장 얼음 삿자리를 굽어보는 것 같다. --중략(中略)-- 공경대부와 고승, 은사들이 먼 이곳을 지척같이 여겨 경치를 찾아 노래하고 화답해서 사롱이 벽에 가득하니, 이 얼마나 성대한 일이냐!

 내가 이런 시를 지었다. "숲 아래 고요하고 외로운 절이/ 흰 구름 언덕 위에 높이 기대었네/ 북으로는 푸른 산이 두르고/ 남으로는 파란 대나무숲 물결이 휘감네./ 샘물은 구슬같은 물방울을 쏟아내고/ 높은 바위는 창을 빽빽이 세운 듯하네./ 이끼 낀 오솔길엔 호랑이가 가다가 내려오고/ 연꽃 핀 못에는 거위가 앉아서 지키네./ 뜨거운 햇살은 난간에 조금 비쳐들고/ 상쾌한 솔바람은 누각에 많이 들어오네./ 산 속 즐거움을 실컷 누릴 수 있으니/ 누가 다시 다른 즐거움을 물으랴?">

#불우한 생애 보냈으나 고려 最高 시인

 김극기의 출신지는 계림(경주). 호는 노봉(老峰). 생몰연도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① 1150년 경-1204년 경 ② ?-1209년 ③ ?-?, 즉 생몰연도를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진정국사호산록(眞淨國師湖山錄)'에는 1209년으로 추정되는 기사년(己巳年)에 사망했다고 적고 있다. '동문선(東文選)'에 실려 있는 유승단(兪升旦)의 '김거사집서(金居士集序)'에는 육품으로 죽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신종 6년(1203년) 금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한 뒤에 다시 전원생활을 하다가 사망했을 가능성이 크다. 대체로 1150년 경에 태어나 60세 정도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본관도 생몰연도처럼 특정할 수가 없지만, 계림인이었기 때문에 경주김씨라고 했다. 또 경주김씨에 근원을 둔 의성김씨에서 갈라진 광주(廣州)김씨라고도 했다. 하지만 근래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김해김씨가 유력하다고 한다. 그의 시 '취시가(醉時歌)'와 '주암사(朱巖寺)' 등을 살펴보면 수로왕과 김유신의 후손인 김해김씨로 판명된다는 것이다. 그는 무신정권기인 의종·명종·신종·희종 4대에 걸쳐 활동했다. 

   진사가 된 뒤에도 벼슬에 뜻을 두지 않다가 40대 후반인 1180년대 말에 명종의 부름을 받고 의주방어판관(義州防禦判官)에 임명됐다. 그 뒤 직한림원(直翰林院)을 거쳐 예부 원외랑(禮部員外郞)일 때인 신종 6년(1203년) 금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오세재(吳世才)와 임춘(林椿) 이외에는 다른 문인들과의 교류가 확인되지 않으며, 생애의 대부분을 전국을 주유하며 지냈다.

    문집 '김거사집(金居士集)'은 1220년 경 당시의 집권자 최우(崔禹)의 명에 의해 간행됐다. 15세기까지는 전해졌으나 그 뒤에 멸실됐다. 때문에 시가 '동문선'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에 흩어져 260여수가 남아 있다. 산문 역시 '동문선'과 '동인지문사륙(東人之文四六)' 등에 흩어져 60여편이 전한다. 그의 시에 대해 당시 문인들은 '표현이 맑고 활달하며 내용이 풍부하다'고 했다.

 유승단은 '참으로 난새나 봉황같은 인물이었다'고 해서 그의 고고한 행적을 찬양했다. 최자(崔滋)는 '보한집서(補閑集序)'에서 고려를 대표하는 시인의 한 명으로 꼽았다. 고려 말 간행된 조운흘의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에 실린 시인 45명의 시 247수 가운데 그의 시가 가장 많은 37수가 실릴 정도로 고려 시인의 높은 봉우리였다.

#농촌 꾸밈없이 그려낸 농민시 개척자

 그의 시는 자연과의 교감을 즐겨 표현하고 있다. 농촌 모습을 관념이나 풍경으로서가 아닌 농민의 입장에서 생생하게 썼다. 농가의 사계절을 읊은 '전가사시(田家四時)'가 대표적이다. '전가사시'는 5언고시(五言古詩) 네 수와 5언율시(五言律詩) 네 수 두 작품이 있다. 모두 농촌 현실을 평이한 시어를 통해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한편 농민의 고단한 삶의 원인을 비판했다. 단순히 관찰자로서만 머물지 않고 농촌의 실상을 파악하고 농민의 삶을 구체적으로 다룬 시를 지었다. 농민시의 개척자였다.

 '전가사시' 율시의 첫 수는 이렇다. <물 속 풀숲에서 물고기 뛰어오르고/ 버드나무 둑에는 철새 날아오르네./ 봄갈이 하는 밭둑엔 창포잎 아름답고/ 들밥 먹는 밭이랑엔 고사리순 향기롭네./ 봄비를 부르는 비둘기 지붕 위에서 날고/ 진흙 머금은 제비 들보로 날아드네./ 저물녘 초가집 안에서/ 베개 높이 베고 누으니 태고적 사람 같네.>

   
 
 농촌시의 진경을 보여주는 또 다른 작품이 '숙향촌(宿香村)'이다. 향촌이라는 마을에서 하룻밤을 머문 느낌을 그렸다. 농민의 처지에 대한 이해와 동정을 담담히 표현한 애민시(哀愍詩)다. <구름길로 사, 오리/ 푸른 산 아래로 내려오는데/ 까마귀 솔개 문득 놀라 날아오르자/ 이제야 뽕나무 늘어 선 마을 보이네./ 마을 아낙 흐트러진 머리 매만지다가/ 수풀 아래 사립문을 열어준다./ 푸른 이끼 오래된 골목을 가득 덮고/ 어린 벼이삭 쓰러진 담장 위를 넘보네./ 초가 처마 밑에 앉은지 오래지 않아/ 해 서쪽으로 저무니/ 땔나무 베어 홀연 밤을 밝히고/ 생선 게 비린 음식을 저녁상에 올리네./ 농부들 각기 방으로 들어가자/ 사방이 농사 이야기로 시끌벅적/ 떠드는 소리 물고기 꿰듯 이어지고/ 웃음소리는 새소리마냥 어지럽네./ 나는 뒤척이며 잠 이루지 못하고/ 베개 의지하며 서쪽 집에 누웠노라니/ 찬이슬에 반딧불 젖고/ 때늦은 귀뚜라미 빈 뜨락에서 울어대네./ 괴로이 읊조리며 누워서 새벽을 기다리니/ 푸른 바다는 아침해를 머금어 붉네.>

 김극기는 40대 후반부터 60대 초반까지 10년 남짓 벼슬살이를 했을 뿐, 생애의 대부분을 전국을 주유했다. 민족의 장구한 역사가 펼쳐지는 국토의 유장함과 웅장함을 노래하고, 원형질 전설과 설화를 형상화했다. 백성의 고단한 삶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관찰해서 시로 지었다. 그의 여정에 울산이 빠질 리가 없었으리라. 경주가 출신지가 아니던가. '대화루시서' 외에 울주군 두서면 인보리에 있었다는 '잉불역(仍弗驛)'과 두서면 활천리의 고개 '열박령(悅朴嶺)'에 대한 시도 지었다.

#'잉불역·열박령' 등 울산다룬 글 다수

 '잉불역'은 가을날 산촌의 주막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나그네의 심사를 담담하게 풀어내고 있다. <아득한 산 아래 길에/ 말 가는대로 내맡긴 채 가을을 노래하네./ 물에는 까끄라기 품은 게 있고/ 숲에는 잎에 가려진 매미 보이지 않네./ 계곡물 소리 맑기가 빗소리 같고/ 들 기운 담박하기가 이내 같네./ 밤이 되어 외딴 여관에 드니/ 마을 사람들 아직도 잠들지 않았네.>

 '열박령'은 나말려초의 경주 명기(名妓) 전화앵(轉花鶯)의 묘가 있다는 곳이다. 시 '열박령'은 그녀를 추억하고 있다. <옥 같은 얼굴이 혼을 재촉해 세상을 떠났는데/ 하늘 끝에서 보이는 것은 층층의 산꼭대기뿐./ 신녀의 비 무협에서 거두었고/ 여인의 바람 낙천에서 끊겼네./ 구름은 춤을 배워 옷자락을 땅에 끌고/ 달은 노래를 엿들어 부채를 하늘에 걸었구나./ 지나가는 길손이 몇 번이나 꽃다운 사람 슬퍼하여/ 수건 가득히 붉은 눈물 흘렸을까.>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