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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후기 잠시 울주군수를 지낸 설곡 정포는 울산 최초로 울주의 경치가 빼어난 여덟 곳을 뽑아 '울주팔경(蔚州八景)'이란 시 작품을 지었다. 사진은 울주팔경 중 하나인 무룡산 서쪽에 있던 큰바위 '백련암'이 있었던 북구 무룡산 전경. 유은경기자 usyek@

 

   
▲ 설곡시고.

설곡(雪谷) 정포(鄭  ).
고려 후기에 잠시 울주군수를 지냈다.
그만큼 울산을 사랑한 사람도 드물다.
울산 최초로 여덟 곳을 뽑아
'울주팔경(蔚州八景)'이란
시 작품을 짓고,
울산을 세상에 널리 알렸다.
울산 사람이나
울산에 재직했던 관리들이
아무도 생각조차 못한 일을 했다.
울산이 영원히
그를 결코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최초로 '울산팔경' 정하고 글로 남겨

정포는 세상을 떠나기 세 해 전부터 큰 시련을 겪었다. 참소를 당하여 왕도 개경으로부터 천리 먼 울주군수로 발령받았다. 그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일이었지만, 울주 사람들에게는 그만한 목민관을 맞는 일이 흔치 않아 진정 축복이었으리라. '울산 사람의 시에 차운하다(次蔚人韻)'란 그의 시에는 '유배를 와서 얻은 것이 없다고 말하지 말라(莫道謫來無所得)'는 구절이 있다. 연보에도 '귀양살이를 하면서도 시를 읊으며'라고 적혀 있다. 울주의 수령으로 발령받은 것은 유배에 다름 아니었던 셈이다.

 그는 허망해지는 마음을 추스려 정사에 힘쓰는 한편, 울주의 경치가 빼어난 여덟 곳을 가려 내어 시를 지었다. 조선 선조 4년(1571년)에 울산군수를 지낸 이제신(李濟臣)은 "설곡은 고려 말의 이름난 사람이다. 울주로 좌천되어 수령이 됐는데, 은혜로운 정사를 베풀었다. 대개 울주의 팔경은 설곡 이외에는 아직까지 들어 본 적이 없다. 강산과 풍월이 설곡에 의해 비로소 드러나게 됐던 것"이라고 적었다.
 정포는 34세 때인 고려 충혜왕 복위 3년(1342년) 가을에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에서 울주군수로 발령받았다. 올바르지 못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임금에게 비판하는 글을 지어 올렸다는 이유로 권력을 좌지우지하던 소인배들의 참소에 의한 것임에야 비애가 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 올망졸망한 열두봉우리로 이뤄진 남산(南山) 중 마지막 12봉인 '은월봉'.

 

 그 때의 심사가 '울주관사의 벽에 짓다(題蔚州官舍壁)'란 시에 드러나 있다. <눈을 들어 멀리 바라보니 내 고향은 어딘고/ 머리를 돌이키니 세월 진정 빠르구나./ 관산 천리에 아득한 꿈이여,/ 비바람 치는 오경에 서글픈 내 마음./ 평생을 생각하니 인생은 나그네,/ 벼슬을 살자니 힘겨워 어이하리./ 시름을 잊는 데는 술만한 게 없으니,/ 잔 들자, 부어라 쉬임없이 채워라.>

 그를 울주에 보내놓고도 반대파들은 가만 놔두지 않았다. 수시로 감독관을 보내 장부를 점검하는 등 피곤하게 했다. 벼슬살이에 대한 회의가 문득문득 일어났다. 그 고통이 다음 시에 나타나 있다. <감히 장부의 기록을 의심하여 선비를 곤하게 하고,/ 가장 두려운 건 관리들을 맞이하고 보내는 일일세./ 우러러 부러운 건, 내 형 고을에 일이 없어/ 날이 밝도록 코를 골며 자는 것일세.>
 그렇지만 자연과 함께 해서 견딜만 했다. 산하의 아름다움에 빠져들었다. 시를 썼다. <백성들에게 어진 정사를 펴지 못하니 부끄러워라./ 수판에 턱 괴고 서산을 바라보니 상쾌함이 새롭구나./ 조만간 벼슬을 버리고 전원에 돌아가,/ 안개비 속에 도롱이 걸치고 강가에서 낚시나 하리.>

짧은 생애에도 지식인의 본분에 투철

 울주의 풍광이 빼어난 여덟 곳을 골랐다. '태화루(太和樓)'와 '평원각(平遠閣)', '장춘오(藏春塢)', '망해대(望海臺)', '벽파정(碧波亭)', '백련암(白蓮巖)', '개운포(開雲浦)', '은월봉(隱月峯)'이다. 태화루는 신라 선덕여왕 때 지어진 태화사 서문루에서 비롯된 누각. 평원각은 그 남문루에서 비롯된 누각. 장춘오는 기화이초가 자라는 태화루 아래 태화강 건너편 언덕. 망해대는 망해사 근처에 있던 돈대. 벽파정은 삼산에 있던 정자. 백련암은 무룡산 서쪽에 있던 큰 바위. 개운포는 처용설화를 간직한 곳. 은월봉은 달빛이 숨는 태화강 건너편 남산 12봉의 주봉(主峰). 현존하는 것은 개운포와 은월봉 두 곳으로, 그나마 심하게 망가졌다.

 그 여덟 곳을 읊은 '울주팔경(蔚州八景)' 사(詞) 작품을 지었다. 설곡집(雪谷集)에 실려 있다. 은월봉은 이렇게 노래했다. <하늘이 가까운 듯 은하수는 환한데/ 봉우리는 높이 솟아 달빛을 가리웠네./ 지팡이 짚고 푸르고 높은 산에 오르니/ 오솔길 한 가닥이 구름 속에 숨었구나./ 해 묵은 나무는 가을빛을 머금었고/ 빈 바위는 저녁놀을 떨치는데,/ 깊은 숲 저 너머에 절이 있음을 알겠거니/ 범종과 법고소리는 산언덕 너머로 울려오네.> 개운포는 다음과 같이 읊었다. <섬에 비치는 구름빛은 따뜻한데/ 강에 이어진 물줄기가 통하네./ 사람들이 말하기를 옛날 처용 노인은/ 푸른 물결 속에서 나고 자랐다네./ 풀띠에 비단치마가 더욱 푸르고/ 꽃자취 남은 얼굴은 붉었다네./ 미친 척 세상을 놀리는 뜻이 무궁하여/ 늘 춤추며 봄바람을 보냈다네.>

 

 

 

 

   

▲ 아홉마리 용이 살았다는 전설이 깃든 북구 무룡산 전경. 정상에 오르면 울산시가지 야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정포는 고려 26대 충선왕 복위 원년(1309년)에 태어나 29대 충목왕 2년(1345년)에 세상을 떠났다. 37세의 나이로 짧은 생애를 마쳤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중부(仲孚)이고, 호는 설곡(雪谷). 일찍부터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졸옹(拙翁) 최해(崔瀣)에게 배웠다. 18세가 되던 충숙왕 13년(1326년)에 과거에 급제해서 예문수찬으로 원나라에 갔다가 고려로 돌아오는 충숙왕을 시종한 뒤 능력을 인정 받고, 좌사간(左司諫)이라는 벼슬에 발탁됐다.

 충혜왕 때 전리총랑(典理摠郞)에서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에 이르렀다. 성품이 강직하여 충혜왕의 폭정을 서슴치 않고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 때문에 미움을 받아 한직으로 밀려나거나 관직을 박탈당하는 고초를 겪었다. 34세 때인 충혜왕 복위 3년(1342년) 가을에 울주군수로 발령받아 다음해 여름까지 근무했다. 1년 가량을 지냈다. 선정을 베풀어서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그뒤 안동에도 잠시 머물렀는데 그 때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는 1343년 여름에 지은 시가 있다. <천리 먼길에 유배를 와서,/ 올해 운수는 더욱 기박하네./ 떠돌이 신세가 어디에 의지하리오./ 다만 의지할 데는 그림자뿐./ 유학을 장차 어디에 쓰리오./ 쓸 데 없는 말은 하지 말 것을./ 스스로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었고,/ 남이 간하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는 것을./ 바른말 하다가 세 번이나 내침을 당했는데,/ 남은 생애에도 온갖 고난과 만나리라.>

울산 주변도 유람 '동래잡시' 등 남겨

 1344년에 원나라 연경에 갔다. 그의 포부와 능력을 고려 조정에서 알아주지 않자 원나라에서 벼슬할 생각이었다. 원나라 승상 별가불화(別哥不花)가 그를 만나본 뒤에 존경하여 장차 황제에게 추천하려 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병을 얻어 다음해 1345년에 세상을 떠났다. 결국 뜻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이승을 하직했다. 고려의 대문장가 이제현(李齊賢)은 그의 인물됨을 "나이는 젊으나 쓸만한 사람, 단아하여 아부할 줄 모르는 어진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 '장춘오'는 신정동 옛 고속버스터미널 뒤편 마을의 태화강강에 있었던 언덕으로 지금의 십리대밭교 끝 지점과 연결되는 마을 어귀이다.

 

 이곡(李穀)이 11살이 많았는데도 서로 친하게 지냈다. 이곡은 정포의 울주팔경을 따른 '차정중부울주팔영(次鄭仲孚蔚州八詠)' 8수를 남겼다. 이곡의 울주팔영은 울주를 직접 둘러보고 지은 것은 아니라, 정포의 시를 본 뒤 상상만으로 지은 것이다. 두 작품은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2 '울산군 제영'의 '팔영' 편에 실려 있다. 아들 대에 이르러서도 정추(鄭樞)와 이색(李穡)이 또 가까이 교류했다.

 정포의 시문집으로는 보물 제709호 '설곡시고(雪谷詩藁)' 2권에 100여편의 시가 전한다. 이색은 '설곡시고서(雪谷詩藁序)'에서 그의 시를 "맑으면서도 고고하지 않고 고우면서도 음란하지 않다. 말이 아담하고 심원하여 시속(時俗)말은 한 자도 쓰지 않았다"고 높이 평가했다. 홍만종(洪萬宗)은 '고려 말의 시인 13인'에 꼽았다. 문장과 글씨에도 매우 능했다.

 정포는 울주에서 지낼 때, 인근 지역을 유람하고 시를 지었다. 동래를 찾았다. '동래잡시(東萊雜詩)'를 남겼다. <관아는 매화 피는 언덕에 있고/ 민가는 강물 가까운 곳에 있네./ 순풍은 끝없이 불어 오고/ 생물은 모두 화락하여 좋아하네./ 사람들은 선비를 보려고 술 들고 오는데,/ 선비는 모두 시 짓기에 여념이 없네./ 이 선경(仙境) 진심으로 사랑하니/ 아무렇게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 구름과 물은 천년을 머금고/ 지금은 봄의 경치가 피어 오르는 2월이라./ 들놀이에 뉘가 뭐래나/ 촌사람들도 모두 따라 나서네./ 넓은 들엔 하늘도 말쑥하고/ 푸른 강엔 해조차 기울지 않네./ 술이 거나하자 흥은 절로 나고/ 나무 타고 앉아 시를 쓰네.>

 

 

 

 

   

▲ 임진왜란 때 소실된 '태화루'는 400년만에 웅장하게 복원된다. 사진은 복원 부지 전경.

 

 가야의 고도 김해도 찾았다. 봄날 양산에 가서 부슬부슬 비 내리는 황산강(黃山江)을 찾아 파릇파릇 짙어가는 봄기운에 빠지기도 했다. 황산가(黃山歌)를 남겼다. <지나는 비 부슬부슬 강 나무 적시고/ 얇은 구름 띄엄띄엄 밝은 햇빛 가리네./ 황산강 깊은 물 건널 수 없고/ 돌아보니 백리 길 구름만 아득하네./ 강머리에 있는 처녀 아름답기도 한데,/ 강물 건느려고 두리번거리며 애를 쓰네./ 우는 비둘기, 새끼 딸린 제비, 봄날은 저물고/ 떨어지는 꽃잎, 나는 버들가지 봄바람은 향기로워./ 뱃사공을 불러보니 어디서 오느냐고,/ 돛 달고 그제야 어산장(魚山莊) 내려오네./ 어느 여인 물어보니 나와 동행이라/ 배 복판에 그녀와 나란히 앉았네./ 나부(羅敷)는 남편 있는 여자라는 것을 알겠으나,/ 그녀의 행동거지는 왜 그리도 경망한고/ 황금으로 그녀를 유혹할리 없고/ 강 언덕에 원앙새 한 쌍으로 눈 돌려지네./ 사공아 배 대어라 내 어찌 머무르랴./ 내 친구는 진정 황모강(黃茅岡)에서 기다린다.>

 국토 산하의 서정에 빠졌다. 썩은 세상에 휩쓸리기보단 전원생활을 희망했다. <시내 굽이진 곳에 초가집을 지으니,/ 땅은 궁벽하나 마음은 멀리 탁 트이네./ 산빛은 자리 위에 가득하고/ 시냇물은 창 앞에서 운다./ 소리 높여 자지곡(紫芝曲)을 노래하며,/ 고요히 주현금을 어루만진다./ 문에는 이르는 거마 없으니,/ 이 즐거움이야 해를 마칠만 하다.> 시심이 활활 타올랐다. 절창이 나오지 않을 리가 없다. <오경 무렵 등잔불은 지워진 단장을 비추는데,/ 이별의 말을 하자니 먼저 애가 끊는 듯 하네./ 달빛 지는 뜰에 문을 열고 나서니/ 살구꽃 성긴 그림자가 옷에 가득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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