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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학 한마리가 날아와 앉아 있는 형상을 하고 있는 마을인 '복산2동' 전경.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중반까지 토지구획정리 사업이 이루어져 개발된 신주택지여서 도시기반 시설과 도시환경이 다른 마을에 비해 양호한편이다.

"연못가에 새로 핀 / 버들잎을 따서요 / 우표 한 장 부쳐서 / 강남으로 보내면 / 작년에 간 제비가 / 푸른 편지 보고요 / 대한 봄이 그리워 / 다시 찾아 옵니다."
 울산시 중구 복산동에서 태어난 아동문학가 신월 서덕출 시인이 일제의 억압 속에 눌려 지내던 우리 민초들에게 희망과 기쁨을 안겨준 동요 <봄편지>이다.

#서덕출 선생 자유의 목소리 들리는 듯

 

 

   
▲ 울산교회 설립기인 1956년 학산동 84-3번지에 마련된 첫 예배당에서 부흥회를 마치고 교우들이 포즈를 취했다.

복산동은 일제의 우리나라 강점시기에 척추를 다친 불구의 몸이라는 부자유 속에서 자유를 노래한 서덕출 시인과, 일제시대 때 설치된 화장장 등의 흔적으로 당시 억압받던 우리 민중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마을이다.

 

 

    지금의 성신고등학교 서쪽 담 아래 공원놀이터 부근에는 화장장이 있었고, 태평양 전쟁이 한창일 당시 마을 주택가에는 일본 군인들이 적기가 날아오는지를 감시하는 2∼3m 깊이에 방호벽을 쌓은 '감시대'가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일제 강점기에도 마을에는 손골·새싯골·풍류골·도화골 등 골짜기가 많았던 덕으로 아낙네들은 물 좋은 냇가에서 빨래를 하고, 빨래터까지 엄마를 따라온 올망졸망한 아이들은 물놀이를 하며 지내던 소박한 멋이 있기도 했다.

#1970년초 교육기관만 5곳 '교육일번지'

또 복산동은 울산지역에 학교가 많이 없었던 1970년대 초·중·고등학교 등 각급 학교들이 밀집해 교육마을로서의 일면을 보여주기도 했다. 지금도 함월초등학교를 비롯해 성신고등학교 등 5개의 각급 학교가 위치해 있지만, 그 시절에는 공립으로서 경남지방의 명문교로 이름을 떨쳤던 울산제일중학교 등 6개 학교가 밀집해 있었다. 해방 이후에는 울산체육의 기틀이 되었던 울산읍 공설운동장과 우시장이 자리하기도 했다. 현재는 울산제일중학교, 울산여자중학교, 울산여자고등학교 등 3개 학교가 마을을 떠나고 우시장이 자리해 이름 붙여진 소전걸은 주택이 빽빽이 들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복산동은 울산이 공업지구로 지정되기 전인 1960년대 이전에는 주민 수가 1,000여 명에도 미치지 못했다. 복산1동은 울산의 상업타운인 옥교동과 성남동의 주거지역으로 확장되면서, 복산2동은 1977년부터 시작된 토지구획정리 사업으로 새로운 택지가 조성돼 주택이 하나 둘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지금과 같은 주거타운으로 모습을 갖췄다.
 콩밭과 참외밭이었던 자리에 중구청이, 야산에 복산2동의 유일한 대형 아파트단지인 새운파래스와 남운럭키, 성지아파트 등이 들어서면서 현재는 주민 수가 2개 동에 2만 7,000여 명에 이르는 거대 마을로 성장했다.

# 1914년부터 복산동으로 불려지기 시작

 

 

   
▲ 지난 2일 서덕출공원으로 명명된 중구 복산공원 전경. 산교육장화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

복산동은 숙종 34년(1708) 동문외리와 동문외노상리의 두 개 마을로 나눠져 있었으며, 각각 7통씩의 호구가 살았다. 정조 때인 1777년에는 동문외리와 동문외노상리 두 개 마을을 합쳐 노상리로 해 오다가 고종 31년(1894)에 노상동으로 바꿔 불렸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노하동 일부를 합해 복산동이라는 지명으로 굳어졌다. 1985년 대통령령으로 구제가 실시되면서 중구 복산동으로 되었다가 1995년 울산시·군 통합 때 복산1·2동으로 분동됐다.

 복산이란 지명에 대한 유래는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밝은 마을'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 민족의 근간이 되는 예맥족들이 해뜨는 동방을 찾아 한반도로 흘러들어 오면서 그들이 살았던 곳에는 도처에 밝음을 뜻하는 지명을 남겨 놓았는데, 울산에서도 그런 지명이 꽤 많다. 그 중 한 글자인 '복'자는 '쮫뫼'(光明山)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기서 '복'은 한자인 '福' '卜'으로 차자돼 씌어졌다. 따라서 복산은 밝은 산, 즉 밝은 마을을 뜻하는 것이 된다.

 복산동의 옛지명으로는 동박·사닥등·복천·복천둑다리·손골·새싯골·큰못·작은못·풍류골·문둥고개·소전걸·양사장내묘등·병막·계변고개·당고개·도화골·느을골·단장골·무등골 등이 있다.
 이중 동박은 '동밖'이 변한 말로 울산읍성의 동문(옛 울산시장 관사 부근) 밖에 마을이 위치해 붙여진 것이다. 서부 복산과 옥교동으로 편입된 학산을 일컫던 지명이다.
 사닥등은 복산초등학교 북편 고개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단등'이 와전된 지명이다. <울산읍지>에 이 사단등을 가리켜 '고을의 동북 오리에 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새싯골은 복산성당(옛 올산성당) 서쪽을 말한다. 손골에서 흘러내려 오는 내를 '새싯골 도랑'이라 했다. 문둥고개는 복산성당 동남쪽을, 우시장이 들어서 붙여진 지명인 소전걸은 지금의 제일아파트 동편을 가리킨다. 도화골은 현재 복산주유소 아래 비탈로 넓고 깊은 골짜기이다. 옛날 여기에 도화사가 있었다고 한다. 느을골은 '늘어진 골짜기'란 뜻으로 울산고등학교 동편에 있는 골짜기인데, 숙종 때는 '능을'(能乙)이라 기록했다. 단장골은 중구청 동편으로 복산과 약사의 경계를 이룬 골짜기로, 단씨 성을 가진 정승이 살았다는 데서 유래한다.
 
# 재개발 앞둔 '복산1동' 행정타운 '복산2동'

복산1동은 면적 0.71㎢에 4,200여 가구 1만 3,80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이 마을은 원래 자연마을이었으나 산업화 이후 인근 옥교동, 성남동이 상업동으로 발전하면서 이들 마을의 배후주거지로 계획성 없이 확장됐다. 이 때문에 도심상권과 인접하면서도 노후불량 주택이 많고, 도로가 협소하는 등 마을환경이 어느 마을보다도 열악한 형편이다. 하지만 현재는 재개발을 앞두고 있어 다시 한번 새로운 모습으로의 변화가 기대된다.

 

 

 

 

   
▲ 노후불량 주택들이 밀집해 있는 중구 복산1동. 도로도 협소해 재개발될 계획이다.

 복산2동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학 한마리가 날아와 앉아 있는 형상을 하고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중반까지 토지구획정리 사업이 이뤄져 개발된 신주택지여서 도시기반 시설과 도시환경이 다른 마을에 비해 양호하다.

 

 

    그래서 면적은 0.68㎢로 중구지역 14개 행정동 가운데 가장 작지만, 신주택지로 각광을 받으면서 유입인구가 몰려들어 현재 3,900여 가구에 1만 3,300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이 마을 주민들은 대부분 전형적인 도시형 산업구조인 2, 3차산업에 종사하고 있는데 계층간 소득격차는 현저한 편이다. 하지만 생활보호대상자는 다른 동과 비교해 가장 적어 주민 대부분이 잘사는 편이다.
 특히, 중구지역의 모든 행정을 관장하는 중구청이 자리해 행정타운으로의 발전이 기대되는 마을이기도 하다. 병영삼거리에서 복산2동사무소를 지나 번영로의 복산교까지 이어지는 1.36㎢ 구간이 10차선으로 확장돼 남구와 북구를 최단 거리로 잇는 교통요충지 역할을 하면서 발전이 가속화되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 역사와 문화의 흔적 곳곳에 남아

복산동은 서덕출 시인이 척추장애라는 불구의 몸으로 창작의 열을 불태우던 곳이다. 그는 여섯 살 때 대청마루에서 발을 헛디뎌 척추를 다치고 일어서지도 못하는 불구의 몸이 됐다. 학교를 다닐 수 없는 처지라 어머니에게서 한글을 깨우치고, 이 집에서 <봄편지> <오빠생각> <따오기> 등 수많은 동요 작품을 탄생시켰다. 학성공원에는 그를 기리는 '봄편지 노래비'가 세워져 있으며, 매년 5월8일 어버이 날이면 이 노래비 앞에서 지역 청소년들의 백일장이 열리고 있다.

 또한 복산동에는 국왕이 관직을 내리던 사령장인 왕지와 교지 4개가 전하고 있어 향토문화재가 되고 있다. 왕지는 임금이 문무관 4품 이상에게 주던 사령장으로 세종 7년에는 교지라고 이름을 개칭하고, 한말에는 칙명이라고 부르던 것이다.
 모두 청안 이씨의 후손인 이현태 씨가 소장하고 있는데, 청안 이씨의 2세인 이종주에게 내려진 것과 청안 이씨 4세에게 내려진 것, 그리고 임진왜란 때 아버지인 퇴사재 이응춘을 따라 의병활동을 한 이승금에게 내려진 것이 그것이다.

 이밖에 역사를 자랑하는 복산성당과 울산교회도 이 지역에 자리하고 있다. 복산성당은 울산 구시가지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으로, 1956년 현재의 자리인 복산1동 494번지에 천주교 부산관구(현 천주교 부산교구) 울산성당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렀다. 복산성당으로 이름을 바꾼 것은 1998년 2월 성당이 위치한 마을지명을 성당명칭으로 해야 한다는 한국천주교 중앙협의회 방침에 따른 것이다.
 복산1동 459-4번지 옛 울산제일중학교 부지에 자리한 울산교회는 1956년 설립돼 장로교 고신계 교회로는 울산지역에서 가장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처음에는 옛 신한공사 건물인 학산동 84-3번지 였으며, 현재의 위치로는 1983년 옮겼다. 글=최재필기자 uscjp 사진=유은경기자 usy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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