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울산에서 벼슬살이를 한 옛 문인학자 가운데
점필재( 畢齋) 김종직(金宗直)도
울산의 풍광을 읊은 시를 남겼다.
더욱이 뒷날 김종직 만큼 이름을 드높인 이도 없다.
조선 성리학의 학통을 이은 큰 별이었다.
학문적인 명성이 너무 높아
상대적으로 시문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그러나 조선 초기에 서거정과 함께 시의 양대 산맥이었다.
그가 울산과 인연을 맺은 것은
벼슬길에 나선 초기에 울산 병영에 있던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영의 병마평사(兵馬評事)로 와서
2년간 근무한 때문이었다.

 

   

▲ 울산에서 벼슬살이를 한 옛 문인학자 점필재 김종직은 선바위, 치술령, 처용암, 동백섬을 비롯한 울산의 명승지를 즐겨 찾아 울산의 풍광을 읊은 시를 많이 남겼다. 사진은 울주군 범서읍 입암리 태화강 상류에 위치한 선바위 전경. 백룡이 살았다고 하는 백룡담의 푸른 물 가운데 깍아 세운 듯한 기암괴식이 선바위로 높이는 33.2m, 수면위 둘레 46.3m, 최정상 폭 2.9m에 이른다. 유은경기자 usyek@ulsanpress.net


그는선바위와 치술령, 처용암, 동백섬을 비롯한 울산의 명승지를 즐겨 찾았다. 울산문협이 펴낸 '울산의 고-근대문학사'와 울산대학교 성범중 교수의 '울산지방의 문학전통과 작품세계' 등의 책에는 단편적이나마 그가 울산에서 지은 한시를 번역해서 싣고 있다. 그의 울산에서의 창작활동을 엿볼 수 있다. 한가위날 병마절도사와 함께 태화강 중류의 선바위에 놀러 나와 '팔월 보름날 절도사를 모시고 선바위에서 놀다(八月十五日陪節度使遊立巖)'란 제목의 시 세 수(首)를 썼다. 성 교수가 번역한 시를 보자.

병마절도사 보좌로 2년여 근무

 <쇠를 깎은 듯 열길이 넘는 기이한 바위가/ 못 가운데 거꾸로 꽂혔으니 그림도 그것만은 못하리./ 저녁 연기가 퍼져 층진 것이 반쯤 드러나는데/ 날아오른 들오리가 내려와서 물고기를 무네.// 바위 밑 물이 도는 곳이 용추(龍湫)인데/ 아마 시인이 이태 만에 노니는 것을 의아해 하리./ 문득 평지에서 바람과 우레가 일어날까 두렵지만/ 금세 가인(歌人)과 악공(樂工)을 재촉하여 물가로 내려가네.// 원융(元戎)과 담소하며 헤엄치는 피라미를 완상하고/ 흥이 나서 돌아오노라니 이슬이 물가에 흥건하네./ 취한 눈으로 말 머리 위의 단정한 달을 바라보고는 /문득 이미 중추가절(仲秋佳節)이 됐음에 놀라네.>

 바쁜 업무에서 벗어나 상급자인 절도사를 모시고 울산의 명승지 선바위에 놀러 나와 그 풍광과 감회를 읊었다. 첫 수는 선바위의 기이한 모양과 물고기를 잡는 들오리를 묘사하고 있다. 다음 수는 용추, 즉 백룡이 살고 있다는 백룡담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용추는 울산 고을의 기우제를 지내는 곳. 마지막 수는 나들이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하늘에 뜬 달을 보고 한가위임을 알고는 놀란 감정을 진솔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 시의 서문(序文)은 선바위를 설명하고 있다. <선바위는 울산의 서북쪽 20리 쯤에 있다. 물은 재약산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언양을 거쳐 바다 어귀에 이르러 황룡연(黃龍淵)으로 들어간다. 선바위는 그 굽이쳐서 돌아가는 곳에 있으며, 물 가운데에 우뚝하게 서있어서 그것을 바라보면 마치 부도(浮屠)와 같다. 그 밑은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는데, 세속에 전하기로는 그 곳에 용이 있다고 한다. 가뭄이 든 해에 호랑이의 머리를 그 곳에 넣으면 반드시 비가 온다고 한다.>

 

 

   
▲ 김종직 교지.

 김종직이 맡았던 병마평사는 정6품직으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영의 최고 직급인 절도사(종2품)를 보좌하는 자리. 병마절도사의 보좌(補佐)와 문서 관장, 군자(軍資), 고과(考課), 군기(軍器) 제작, 군장(軍裝) 점검 등 병마절도사영의 중요 업무를 담당하는 병마절도사의 유일한 직속 문신 막료다. 임기는 통상 2년. 김종직은 병마평사 자리를 거친 뒤에 중앙 부서로 자리를 옮겼다.

 치술령도 찾았다. 볼모로 간 왕자를 구하기 위해 일본으로 간 남편을 그리다 바위가 된 박제상의 아내 김씨부인의 행적을 찬양하는 시 '치술령( 述嶺)'을 지었다. 평민사가 펴낸 '한국의 한시-점필재 시선'에도 실려 있다. <치술령 꼭대기에 올라 일본을 바라보니/ 하늘에 닿은 물결은 끝도 없구나./ 낭군은 떠날 때에 손만 흔들었는데/ 살았는지 죽었는지 소식도 없네./ 소식이 끊어지고 길이 헤어졌으니/ 죽은들 산들 어찌 다시 만날 때가 있으랴./ 하늘에 부르짖다 무창(武昌)의 돌로 화했으니/ 열녀의 기백이 천추에 하늘을 찌르네.> 옛 중국의 열녀가 전장에 끌려간 남편을 기다리다 무창(武昌)의 돌로 변한 것처럼 박제상의 아내도 역시 돌로 변한 열녀임을 찬양한 것이다.

성리학 학통 계승…이름난 제자 양성

 김종직은 조선 세종 13년(1431년)에 태어나 성종 23년(1492년)에 별세했다.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계온(季), 효관(孝 ). 호는 점필재( 畢齋). 시호는 문충(文忠). 밀양연극촌에서 5분여의 거리에 있는 경남 밀양시 부북면 제대리에 생가 추원재(追遠齋)가 있다. 조선 성리학의 학통을 잇는 아버지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가 고려 말 1389년 그 곳에 거처를 정했으며, 김종직이 태어나고 죽은 곳이다. 순조 10년(1810년) 사림들과 후손들이 합심해서 건물을 고쳐 지어 추원재라 했다. 당호(堂號)는 전심당(傳心堂). 전심이란 조선의 성리학의 전수자라는 뜻으로, 성리학의 학통을 이은 김종직을 일컬는다. 생가 뒤편에 묘소가 있다. 종택(宗宅)은 경북 고령군 쌍림면 합가리 개실마을에 있다.

 29세 때인 세조 5년(1459년)에 문과에 급제했다. 정자(正字)와 감찰(監察) 등 초급 관리로 중앙 부서에서 근무하다가, 벼슬길에 나선 5년 뒤 세조 10년(1464년)부터 세조 12년(1466년) 사이의 2년여간 울산 병영에 있던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영의 병마평사(兵馬評事)로 있었다. 이조좌랑과 수찬 등을 거쳐 1483년에 우부승지에 올랐으며, 이조참판과 병조참판, 홍문관 제학, 도승지, 한성부윤, 형조판서를 지냈다. 1470년부터 1480년대 초까지 함양군수와 선산부사 등 지방관을 지내면서 나중에 문묘에 배향되는 김굉필(金宏弼)과 정여창(鄭汝昌) 외에도 김일손(金馹孫), 유호인(兪好仁), 남효온(南孝溫), 조위(曺偉), 이맹전(李孟專), 이종준(李宗準) 등의 훌륭한 제자를 길렀다. 문인록에 오른 제자만도 63명이나 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불행의 연속이었다. 세 아들을 잃고, 1482년에는 아내마저 세상을 떠났다. '죽은 아내에게 바치는 제문'이란 시가 더욱 애절하다. <적막해라 서편 방 그대 있던 곳이었네./ 옷 이불 대야 빗자루 그대 물건 그대로 있네./ 음식과 기물도 편의대로 따랐건만/ 자식 낳은 수고에도 아이 하나 없으니/ 상복 입을 사람 누구인가 아아 모두 끝났구나.> 남평문씨와 다시 혼인해서 늦게 아들을 얻었다. 1489년에 형조판서를 끝으로 은퇴해서 고향 밀양으로 돌아와 유유자적하다가 예순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기행·애향·애민시 많이 지어

 정몽주(鄭夢周)와 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은 아버지에게 학문을 배웠다. 벼슬을 하면서도 항상 정의와 의리를 실천했다. 그 정신이 제자들에게 이어졌고, 실제로 제자들은 절의를 높이며 의리를 중히 여기는 데에 힘썼다. 자연히 사림들로부터 존경받는 정신적인 영수가 됐다. 그의 도학을 정통으로 이은 김굉필이 조광조(趙光祖) 같은 걸출한 인물을 배출해서 학통을 계승시켰다.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ㆍ정여창-조광조로 이어지는 성리학의 계보가 형성된 것이다.

 그를 언급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1457년에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해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이다. 그가 죽은 6년 뒤에 일어난 무오사화의 원인이 됐다. 제자 김일손이 사초에 적어 넣어 것이 빌미가 돼 연산군 4년(1498년)에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많은 사림이 죽임을 당하거나 귀양갔다. 그도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했다. 문집도 불태워졌다. 함양군수를 지낼 때 수준이 낮다는 이유로 훈구파 유자광(柳子光)이 지은 글을 기록한 편액을 떼어 버린 것도 무오사화 때 불씨로 작용했다. 중종이 즉위하자 죄가 풀리고, 숙종 때 영의정이 추증됐다. 밀양의 예림서원과 구미의 금오서원, 함양의 백연서원, 금산의 경렴서원 등에 배향됐다. 문집으로'점필재집( 畢齋集)'이 있고, 저서는 '유두류록(遊頭流錄)', '청구풍아(靑丘風雅)' 등이 있다.

 그의 시는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과 자신을 돌아보는 마음, 자연으로 돌아가 한가롭게 살고 싶은 마음 등이 진솔하게 나타나 있다. 당대 문단을 주도한 것은 무려 23년간을 대제학으로 있었던 서거정이었지만, 실제로 김종직이 더 뛰어난 시인이었다고 평가했다. 조선 4대 문장가 장유(張維)는 "조선조의 글이 고려 때만 같지 못하지만, 명가(名家)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김수온, 김종직과 최립이라고 하고, 그 중에 김종직이 가장 우수한데, 그 까닭은 사리(詞理)가 잘 갖춰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김종직의 유두류록(遊頭流錄), 즉 지리산 산행기는 지리산 유람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함양군수로 재직하던 성종 3년(1472년) 8월 14일부터 18일까지 4박5일간 제자 유호인, 조위 등과 함께 지리산을 올랐다. 그는 유두류록에서 <아, 두류산은 숭고하고도 빼어나다. 중국에 있었다면 반드시 숭산(嵩山)이나 대산(垈山)보다 먼저 천자가 올라가 봉선(封禪)하고, 옥첩(玉牒)의 글을 봉하여 상제에게 올렸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무이산(武夷山)이나 형악(衡岳)에 비유해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 그의 유두류록은 다른 이들의 유람기와는 달리 유람지침서도 첨부하고 있다. 두류산 기행시도 지었다. <문은 등나무 덩굴에 가리고 반쯤은 구름인데/ 높다란 바위 틈에서 차가운 물이 콸콸 나오네./ 고승은 결하를 마치고 다시 석장을 날려/ 숲속에는 원숭이와 학만 남아서 깜짝 놀라네.>

 

 

정몽주 본향 영일 비롯 인근지역 유람

    울산의 병영에서 근무할 때 인근 지역도 유람했다. 영일(迎日)을 찾았다. 어득호(魚得湖) 현감이 객관을 새로 짓고, 그 당호와 기문을 지어달랐고 요청해 영일을 찾은 것. 인빈당(寅賓堂)이라 했다. '인빈'이란 인시(寅時)의 손님이란 뜻으로, 인시(새벽 3시-5시)에 동녘에서 떠오르는 해가 인빈이다. 손님을 맑게 곱게 맞이하는 인빈의 고을 영일에 걸맞는 이름이다. 인빈당 기문(記文)도 지었다. <-전략(前略)-우리 나라에서도 해변이 한 군데가 아니지만 계림(鷄林)의 임정(臨汀)을 해 맞는 곳으로 삼았으며, 어후가 비록 희씨(羲氏), 화씨(和氏) 같은 측후관도 아니지만 6년 동안을 어느 하루도 부상에서 돋는 해를 맞이하지 않은 날이 없었으니, 내가 한 말이 적중했다고 하지 않겠는가. 어후께서 만약 마음에 드신다면 이 기문을 전해도 좋고, 아니면 다시 당세의 훌륭한 문장가를 구하여 기록함이 좋을까 한다>고 했다.

 

 

   
▲ 경상북도 고령군 합가리 개실마을에 있는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종택이다. 선산김씨 문충공파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1985년 10월 15일 경상북도민속자료 제62호로 지정되었다.

 영일은 김종직이 사표로 삼은 정몽주의 본향. 그를 기리는 시를 지었다. '문충공의 청림 옛 터에서(詠文忠公靑林舊基)'란 제목의 시. <지난 날 북쪽에 있는 고죽국(孤竹國)을 가봤고/ 지금은 남쪽에 있는 정공의 고향엘 왔네./ 이 몸은 남북으로 어디를 가나 다행이고/ 천고에 길이 빛날 충혼에 배알했네.>

 김종직을 배향한 밀양의 예림서원(禮林書院). 밀양시 부북면 후사포리에 있다. 정문 독서루(讀書樓)를 들어서면 좌우에 몽양재(蒙養齋)와 열고각(閱古閣)이 나온다. '몽양'이란 어리석음을 깨우친다는 뜻이고, '열고'는 옛 서적을 열람한다는 뜻. 계단을 오르면 강당 구영당(求盈堂)이다. '구영'은 가득 참, 즉 완성됨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학생들로 하여금 어진 인간이 될 수 있게 완성됨을 향해 전심전력해야 함을 가르치는 곳이 구영당이다. '극준조약무생과실(克遵條約无生過失)', 즉 '이치와 규약을 지극히 잘 따르면 잘못이 생겨날 수가 없다'란 현판이 원칙에 충실히 살다 간 선생의 뜻을 일깨우고 있다. 혼탁한 이 시대에 꼿꼿했던 선생의 선비정신이 그립다.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