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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산이 높이 솟고 한강이 빙 둘러 있는데
하늘에 내리는 눈발이 어지러이 흩날리네
고향 선산에서 목숨을 끝내려는 이 누군가?
종사를 붙들어 일으키려던 이 뜻은 어긋났네
장막 안의 매화에서 섣달의 빛이 그리워지고
언덕 위의 버들가지는 봄빛에 예뻐지려 하네
지난 밤 베갯머리에서 잠깐 꿈을 꾸었는데
티끌 세상을 멀리 떠나 학과 짝하여 노닐었네

 

 

   
▲ 양희지는 어려서부터 충숙공 이예 선생의 후원으로 학업에 정진했다. 후일 그의 손녀와 결혼해 울산사람이 됐다. 사진은 석계서원.

양희지는 갑자년(甲子年), 연산군 10년(1504년) 2월 초닷새에 성희안(成希顔)에게 준 '차증성희안우옹(次贈成希顔愚翁)'이란 시(詩)다. 이 겨울 바깥엔 천지를 온통 뒤덮으며 눈발이 어지럽게 휘날린다. 지난 밤 티끌 세상을 벗어나 학을 벗삼아 한가롭게 노닐던 꿈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벼슬을 그만 둔 몸이야 선산에 의지하고 싶기만 한 마음을 솔직하게 그리고 있다.

 

 


 양희지는 훗날 조선 성리학의 큰 별이자 도학정치의 길을 연 조광조(趙光祖)를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 들게 한다. 연산군 4년(1498년)에 김일손(金馹孫)이 쓴 사초(史草)가 빌미가 돼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났다. 김굉필은 평안도 희천(熙川)에 유배됐다. 그 해 겨울 희천 유배지로 어천찰방(魚川察訪) 조원강(趙元綱)의 아들이 찾아왔다. 나이 열일곱의 조광조가 김굉필의 제자가 되기 위해 찾아 온 것. 양희지의 소개장을 들고 왔다. '증조수재 광조(贈趙秀才 光祖)'라는 제목 아래 짧은 산문(幷小序), 즉 소개의 글과 시(詩)로 돼 있었다.


김시습·정여창 등 전국적 교류
김굉필에게 조광조 소개까지
대사헌까지 오른 사림파 거목


 그 글에는 "수재 조군은 친구의 아들로 나이 스물이 되지 않았는데, 개연(慨然)히 구도(求道)의 뜻이 있던 차에 김대유(김굉필) 사문(斯文)이 학문의 연원이 있다 함을 들었던 모양이다. 고향 어천의 어버이 곁을 떠나 대유의 희천 적소로 가서 제자로서 배우기를 청하려고 한다면서 나에게 소개의 글을 써달라고 했다. 그 간절한 뜻을 저버릴 수 없어 두어 구절 글을 써서 주고, 대유에게 보이라고 했다. 대유의 화(禍)를 혹시라도 더욱 끼쳐주지나 않으려는지?"라고 적혀 있었다.


 조광조가 김굉필의 제자를 자청해서 소개하니, 가르치는 일로 또 어려움을 겪을까 걱정이 되지만 받아주라는 부탁이었다. 함께 보낸 시는 조광조에게 준 시편이다. <열일곱 살짜리 조씨 집안의 수재가/ 많은 제자중의 한 사람이 되겠단다/ 도(道)를 구하려는 뜻이 하도 간곡하여/ 멀리 관서 지방의 고향을 떠났다네> 김굉필은 혼신의 힘으로 조광조에게 학문을 전수해 우리 나라 유학사의 정맥을 잇게 했다. 훗날 이황(李滉)은 그 광경을 이렇게 적었다. "조광조는 난세를 당해서도 기꺼이 위험과 난간(難艱)을 무릅쓰고 김굉필을 스승으로 섬겼다. 두 사람은 실로 다정하고 숨김이 없었다"


 양희지는 당대의 명사들과 교유(交遊)했다. 증답(贈答) 수창(酬唱)한 작품이 많다. 사료로서의 가치를 지닌 것도 허다하다. 양희지가 김시습과 경주 금오산에서 만난 사연은 이 연재물의 '김시습' 편에서 이미 소개했다. 양희지는 김시습의 승려 제자에게도 시를 써서 주었다. 김시습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믿고 존경하며 따르던 선행(善行)이란 중에게 준 '증선행부도 이수(贈善行浮屠 二首)'란 시가 그것이다.

 

 

   
▲ 오천서원.

 양희지는 그 시의 짧은 서문에서 "선행은 동봉 김열경(시습)의 제자이다. 동봉이 절에 귀의한 이래 선행이 스승으로 섬기며 한결같이 존경했는데, 휘추리로 비록 매를 맞는 일이 있어도 끝내 배신하지 않았다. 우리 나라 산천 중에는 동봉의 발자취가 닿지 않은 곳이 거의 없는데도 선행은 모두 따라 다녔으니, 가상한 일이다. 지금 우연히 흥덕사에서 만났는데, 그가 돌아갈 때 나에게 한 마디 해달라고 청하기에 생각나는대로 시 두 수를 읊어 이별의 말로 주면서 동봉에게 전달하라고 일렀다. 이 때가 성화 13년(성종 8년, 1477년)이다"라고 적었다.

 


 두 수의 시는 이렇다. <스승을 모시고 배우는 그대 총명하여/ 온갖 산천을 지팡이 짚고 따라 다녔네/ 요즘 동봉은 아무 탈이나 없는가?/ 슬픈 노래로 이별하나 정만은 남네/ 동봉 거사는 기발한 재주 깊이 숨기고/ 이름을 절에 감춘 지 이십 년 되었네/ 조정의 정승들과 정치하는 데로 돌아와/ 중천의 해처럼 밝은 나라 만들지 않으려나?>


 김굉필과 조위(曺偉)에게도 시를 보냈다. '기증김대유(굉필), 조대허(위)적중[寄贈金大猷(宏弼),曺大虛(偉)謫中]'이란 작품이다. <오래된 세신들은 이미 사라지고 많지 않은데/ 대가 꺾이고 난초도 마른 게 운명임에 어쩌랴?/ 만사는 장자후처럼 여색에 빠져서는 안 되고/ 소동파가 설파한 삼생석에 새긴 인연 같다네/ 주역은 조용한 곳에서 더욱 힘써 공부해야 하고/ 시는 명승지에 이르거든 뒤로 미루지 말고 읊게/ 덕 있는 사람 이웃이 있음은 하늘의 뜻이니./ 잠시 비운에 빠져 있다고 한탄할 필요는 없네.>


대구서 태어나 충숙공 후원으로 학업
병마절도사영 이전 등 건의
서거정과 태화루 올라 시 남기기도

 

 

 

   
▲ 오천서원 현판.

 김굉필과 함께 훗날 문묘에 배향된 정여창과도 교유했다. 정여창이 성종 21년(1490년) 별시문과에 합격하자, '급제를 축하하며'란 시를 지어 보냈다. <새벽 해 궁중에 떠오르니 엷은 먹 빛깔 새로워라/ 간곡한 임금 말씀 진정한 유자라 하셨도다/ 평소 우리 임금과 백성을 요순시대로 이끌게 하고파/ 인재 얻었음이니 일어나 대궐 섬돌 보고 절을 올리네>

 

 

 


 양희지는 세종(世宗) 21년(1439년)에 태어나 연산군(燕山君) 10년(1504년)에 죽었다. 본관은 중화(中和). 자는 가행(可行). 호는 대봉(大峯). 일찍이 집안이 외롭고 가난해 여러 곳을 떠돌다가 울산에 와 양근군수(楊根郡守) 이종근(李宗根)의 딸과 결혼해 울산에서 살았다. 그래서 울산 사람이 됐다. 세조(世祖) 8년(1462)에 생진(生進) 양시(兩試)에 합격하고, 성종(成宗) 5년(1474년)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했다. 성종으로부터 희지(稀枝)라는 이름과 정보(楨父)라는 자(字)를 하사받았다. 나중에 다시 처음 이름 희지(熙止)로 썼다. 문과에 합격한 뒤 검열(檢閱)을 맡았다. 이듬해 성종 7년(1476년) 6월에 승문원 정자(正字)로 있던 중에 성종이 부활시킨 호당(湖堂)에 뽑혀 채수와 조위, 권건, 허침, 유호인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조선 성리학의 학맥을 이은 김종직(金宗直)이 이들에게 하시(賀詩)를 보냈다. <만명 중에 선발된 여섯 인재/ 요순시절 만드는 일 이들에게 달렸네/ 조정의 문형 잡은 사람들을 보게나/ 반이나 세종 때 기른 사람이라네> 세종이 집현전에서 양성한 인재들이 성종 때 문단의 중심으로 활약하고 있는 것을 들어, 신진문사들이 학문에 힘써 국가의 간성(干城)이 될 것을 바랐다.


   성종 9년(1478년) 부수찬에 올라 경연관을 겸직했다. 교리(校理)와 문학(文學), 대사간, 충청도관찰사 등을 거쳐 도승지에 올랐다. 연산군(燕山君) 4년(1498년)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자 사퇴한 뒤, 2년 뒤에 벼슬자리에 다시 나갔으나 권신들과의 충돌로 물러났다. 연산군 10년(1504년)에 한성부 우윤(右尹)을 거쳐 우빈객(右賓客)이 됐으나 곧 병으로 숨졌다. 문집으로는 4권 2책의 '대봉집(大峯集)'이 있다.


 성종 24년(1493년) 10월에 지금의 중구 병영에 있었던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영을 옮길 것을 건의했다. "군영의 주장(主將)되는 자는 마땅히 왜인(倭人)과 뒤섞인 곳에 있을 수 없다. 병마절도사영이 염포의 왜인과는 가까이 있고, 수로(水路)로 10여리요, 육로로 20여리에 지나지 않으며 소리치면 서로 들릴 정도라서 바로 볼 때 성위의 깃발을 역력히 볼 수 있어 좌병영(左兵營)을 내지(內地)로 옮겨 엿볼수 없게 하는 것이 옳다"고 했다. 울산 출신으로서 울산 사정을 소상하게 잘 아는 처지에 있었으므로 이설을 건의했다는 것.

 

 

   
▲ 이휴정.

 영조 25년(1749년)에 만들어진 울산 최초의 읍지 '학성지(鶴城誌)' 인물(人物) 난에 다음과 같이 소개돼 있다. <자(字)는 가행(可行)이고, 대구인(大丘人)이다. 어려서 외롭고 가난하여 본군(本郡)에서 타향살이를 했는데, 문의현령(文義縣令) 이종근(李宗謹)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함으로써 생관(甥館), 즉 처가에서 마련해준 집에 살았다. 세조(世祖) 8년(1462년) 임오년(壬午年)에 사마(司馬) 양시(兩試)에 합격하고 성종(成宗) 5년(1474년) 갑오년(甲午年)에 문과(文科)에 급제했다. 성종(成宗)께서 희지(熙止)를 희지(稀枝)로 고치도록 했다. 호당(湖堂)에 뽑히고 내외(內外)의 관직에 두루 오르고 7도(道)를 안렴(按廉)했다. 벼슬은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다. 연산(燕山) 갑자년(甲子年, 1504년)에 말릉 마을의 집에서 죽어서, 부(府)의 함월산(含月山)에 장사지냈다>

 


 대구읍지에는 <대봉 선생은 세종 21년 순창군수를 지낸 아버지 맹순(孟純)과 어머니 나주정씨 사이에 3남으로 태어났다. 4~5세 때 모친과 함께 울산으로 가서 그 지역의 세력가 충숙공(忠肅公) 이예(李藝)의 후원으로 학업에 정진한 것 같다. 충숙공이 손녀의 배우자로 삼은 것에서 알 수 있다>고 돼 있다.


 성종 9년의 조선왕조실록에는 '노모(老母)가 형과 그 아들과 함께 대구부에 살고 있다'고 했다. 또 무릉서당기(武陵書堂記)에는 '그들이 산 곳을 미리(美里), 즉 지금의 대구 동촌 일대'라고 했다. 따라서 양희지의 나이 40세를 전후해서 모친과 형은 울산에서 대구 동촌으로 옮겨와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뒤에 아들이 대구의 재지사족 옥산전씨 집안의 딸과 혼인해서 처향(妻鄕)인 대구에 살게 되면서, 지금의 대구 수성구 파동에 정착했다. 그런 연유로 양희지는 파동에 있는 오천서원(梧川書院)에 배향됐다. 또 세조 때 문과에 급제한 박한주(朴漢柱)와 함께 대구지역의 16세기 사림파 인물로 꼽히고 있다.


 양희지가 사천현감으로 있을 때인 성종 9년(1478년)에 경상도 순찰사로 온 서거정이 병마를 점검하기 위해 도내를 순행했다. 다음해에 울산에도 들렀다. 종사관 이세우(李世佑)와 사천현감 양희지(楊熙止) 등의 안내로 태화루에 올랐다. 태화루의 풍광은 만리에 미치지 못함을 한탄할만큼 빼어난데도, 때 마침 비바람이 거세게 휘몰아쳐 그 흥취를 느끼지 못함이 안타까워 시름에 잠겼다. 그런 마음을 절절히 표현한 '울산 태화루(蔚山 太和樓)'란 시를 지었다. 양희지도 태화루 시를 지었다. '사상(使相) 서거정과 함께 태화루에서 놀면서 그의 시의 운(韻)을 따라 짓다(次徐使相遊太和樓韻同從事李公世佑柳公桂芬鄭公錫堅及先生)'란 시(詩)다. 최근 발간된 태화루 시문집에 송수환의 번역이 실려 있다.


 <우리 고을 명승은 이 누각이라고 말하고/ 아름다운 교화(敎化)는 명사들 덕분이라네/ 개운포는 넓디 넓어 땅 끝까지 펼쳐 있고/ 은월봉은 높디 높아 하늘 끝에 닿았구나/ 아스라한 서울은 북두칠성 아래이겠고/ 산과 바다 장쾌한 유람, 이 가을이 기억되리/ 처용과 계변천신은 소식조차 없으니/ 안개 낀 물결 바라보며 만고 시름에 잠기네> 양희지는 '성종 때의 명신(名臣)이요, 연산군 때의 직신(直臣)'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만큼 올곧은 천성을 지녔다는 뜻이다. 그러니 청화의 직을 두루 거쳐 대사헌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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