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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涯遊子惜年華 千里思歸未到家 一路東風春不管野桃無主自開花". 김안국(金安國)의 뛰어난 문학적인 자질을 엿볼 수 있는 '途中卽事(도중즉사)'란 시(詩)다. 많은 이가 이 시를 번역했지만, 아무래도 손종섭 선생의 것이 마음을 뺐는다. '고향 돌아오는 길에'란 제목을 붙였다. "객지 세월 아까워라!/ 천리 먼길 돌아올 제,/ 길이 부는 봄바람이 봄 관리는 정작 안 해/ 복사꽃 임자도 없이 멋대로들 피었구나!"

문장력 뛰어난 정치가·학자
소학언해 발간 민간에 보급
개운포 찾아 절경 시로남겨
울산·언양 학생에 권학도모

"고향으로 돌아오는 신나는 길이다. 봄바람에 말을 채쳐 천릿길을 달리노라니, 처처에 임자도 없는 복사꽃이 지천으로 피어 있다. 제멋대로 불어 오는 봄바람을 봄도 어찌할 수가 없다. 하물며 봄바람에 앞 다투어 피는 꽃을 어느 누가 제어할 수가 있겠는가? 봄의 관리를 벗어난 봄꽃들이, 야! 소리라도 치듯, 일시에 피기를 다투는, 꽃들의 시위 물결 앞에, 봄도 통제의 손을 놓고, 그 황홀 속에 망연자실(茫然自失)하고 있는 듯하다." 아무려나, 펑펑 쏟아져 내리는 봄꽃을 봄이 어찌 할 수 없다니, 아아!

 

 

   
김안국이 지은 15권 7책의 '모재집(慕齋集)'

 김안국은 조선 전기의 학자로, 정치가로 전형(典型)이었다. 글솜씨 또한 빼어났지만, 그것에 기울지는 않았다. 그래도 천품을 속일 수는 없었다. 문학적인 자질이 뛰어나 주로 홍문관에서 문한(文翰)의 임무를 맡았다. 그의 문재를 짐작할 수 있는 시작품이 상당수에 이른다.

 '비 오는 날 엄효중의 집을 찾아 접시꽃을 읊다(雨中訪嚴孝中詠葵)'란 시를 보자. "松枝籬下小葵花 意切傾陽奈雨何 我自愛君來冒雨 不知姚魏日邊多 (솔가지 울타리 아래 조그만 접시꽃/ 햇님 향하여 기울제도 비가 오니 어쩌나/ 내가 너를 사랑하여 와서 비를 맞노니/ 햇볕 아래 많이 핀 모란꽃은 모른다네.)"

 비 오는 날 친구의 집을 찾아 비를 맞고 피어난 조그만 접시꽃을 본다. 해를 향해 기울려는 그 마음이야 간절하겠지만, 비가 저리 내리니 속수무책이다. 그 마음이 너무나 애처로워 비를 무릅쓰고 네 앞에 섰다. 볕 좋은 날 화려함을 뽐내는 모란꽃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접시꽃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은 친구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나라를 위해 일할 큰 역량을 지녔어도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다는 숨은 뜻을 비를 맞는 접시꽃에 빗대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교육으로 세상을 바꾸리라'. 조선 성리학의 정맥을 이은 김안국이 평생에 걸쳐 실천한 목표다. 벼슬길에서나, 강호에서나 후학을 키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조선 중종 12년(1517)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 각 고을을 돌며 향교를 찾아 학문을 권장하는 시를 지어 학생들에게 내렸다. 대표적인 것이 '함양 고을의 학생들을 권장함(勸咸陽學者)'이란 작품이다.

 "김공(金宗直)의 정화(政化)에 정공(鄭汝昌)의 고향이니/ 상숙(庠塾)의 훈훈한 바람 온 고을 어질도다./ 소학의 공부야 모름지기 힘쓸지니/ 두 선현의 끼친 모범 우리 어찌 잊을손가." 김종직은 일찍이 함양군수로 있으면서 백성을 덕화로 다스린 영남학파의 종조(宗祖)다. 정여창은 함양 출신으로 뒷날 문묘에 배향된 큰 인물이다. 두 선현을 인격 형성의 본보기로 학생들에게 제시한 것이다.

 울산과 언양 고을을 순시했을 때에도 향교를 찾았다. 학생들에게 소학(小學)을 힘써 공부해서 군자로서의 바탕을 갖추도록 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울산 학도에게 권함(勸示蔚山學徒)'이란 시와 '언양 학도에게 권함(勸示彦陽學者)'이란 시를 지어 줬다. 울산광역시가 1999년에 펴낸 '태화강에 배 띄우고(송수환 번역)'란 한시선집에 실려 있다.

 "감당(甘棠) 치적을 감히 이으려 하랴마는/ 남녘 땅에 와서는 공연히 절행(節行)을 말하누나./ 조그만 충성심을 어디다 붙여볼까/ 여러 교생에게 소학 권장할 뿐이구나. (울산)". "백성들의 삶은 삼강오륜 속에 있고/ 선각자의 좋은 말씀은 선행 속에 있나니/ 요점을 끄집어 내어 규범으로 삼을 지라/ 교생들이 어찌 세세히 공부하지 않으랴. (언양)"

 김안국이 선비의 바탕으로 소학을 강조한 것은 스승 김굉필(金宏弼)에게서 비롯됐다. 김굉필은 성인이 돼서도 '소학동자(小學童子)'로 불린 이로, "소학은 모든 학문의 입문이며 기초인 동시에 인간교육의 절대적인 원리"라고 역설했다. 자연스레 김안국이 소학의 가치에 눈을 뜨게 됐고, 백성 교화의 수단으로 적극 권장한 것이다.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에 '소학'을 한글로 번역한 '소학언해(小學諺解)'를 발간해서 민간에 널리 보급시켰다.

 

 

 

 

   
울산향교 석전대제 모습.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바탕임을 강조했다. 어릴 때부터 일상의 생활 습관을 바르게 할 수 있게 소학을 제대로 익혀 자신을 온전하게 닦는 '수기(修己)'를 이룬 뒤에야 남을 다스리는 '치인(治人)'의 길에 나아갈 수 있다는 것.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소학은 어린아이나 배우는 유치한 학문'이라면서 외면하는 것이 일반적인 풍토였다. 때문에 '글을 조금만 알면 도학(道學)을 논하지만, 몸으로 체험한 것이 아니라 껍데기만 주워 모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인간됨의 기본이 소학에 있음을 역설한 것. 교육붕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은 오늘날 큰 가르침이다.

 백성들의 살림살이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농서(農書)와 의서(醫書) 등을 펴냈다. 경상도 관찰사와 전라도 관찰사로 있을 때에 한문으로 된 농서(農書)와 잠서(蠶書)를 백성들이 알기 쉽게 한글로 번역해 보급하는 일을 적극 펼쳤다. '벽온방'과 '창진방(瘡疹方)' 같은 의학서도 펴냈다. 애민정신으로 백성들의 곤궁한 삶을 어루만져 주었던 것이다.

 그런 한편으로 교화에도 힘썼다. 편안한 공동체 생활을 할 수 있게 '여씨향약언해(呂氏鄕約諺解)'와 '정속언해(正俗諺解)', '이륜행실도언해(二倫行實圖諺解)' 등 각종 교육서를 펴내 널리 보급했다. 특히 부강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백성들도 글을 사용해야 하며, 문화의 대중화를 이뤄야 한다는 신념으로 손수 물이끼와 닥을 합해 태지(苔紙)라는 값싸고 질 좋은 종이를 직접 만들고, 사용을 권장했다.

 그의 이름 안국(安國)이 '위자안지(危者安之), 즉 위태로운 사람을 안녕케 한다'는 말에서 따왔음을 항상 잊지 않았다. 나라를 다스리거나 공동체를 이끌어 가는 지도자는 백성이나 무리를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게 하지 않아야 함을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당연히 백성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열린 자세를 갖췄다. 경상도 관찰사로 울산을 순시했을 때에 지은 '태화루에서(題泰和樓)'란 시가 민원에 귀 기울인 그의 모습을 엿보게 한다. '태화루 시문집'에 실려 있다.

 "백일동안 말 달리다 한나절 한가하니/ 어지러운 문첩 소장이 태화루에 따라 오르네./ 나는 지금은 잠시 강산의 주인이지만/ 노닐 날은 나는 기러기 멀어지듯 사라져가네." 시의 원주(原註)에는 "경차관 표빙과 점마사 황사우와 함께 태화루에 올랐는데, 백성들이 따라 올라와 문첩과 소장을 제출하면서 부르짖기를 그치지 않았다(與表敬差憑 黃點馬士祐 登泰和 投牒訴者攀呼不已)"고 했다. 울산 고을 백성들이 민원을 제출하기 위해 울산을 순시한 관찰사(김안국)가 경차관 표빙과 점마사 황사우와 함께 오른 태화루에까지 따라와 소란스러웠던가 보다.

 김안국은 조선 성종 9년(1478)에 태어나 중종 38년(1543)에 숨졌다. 본관은 의성. 자는 국경(國卿). 호는 모재(慕齋). 시호는 문경(文敬). 아버지는 참봉 연(連)이며, 어머니는 양천허씨(陽川許氏). 경상도 관찰사로 울산과도 인연이 있는 사재(思齋) 김정국(金正國)이 아우. 조광조(趙光祖)·기준(奇遵) 등과 함께 김굉필에게서 배웠으며, 지치주의(至治主義)에 입각한 도학정치의 실현에 힘썼다.

 연산군 7년(1501)에 생진 양시에 합격하고, 이태 뒤 연산군 9년(1503) 문과에 급제해서 승문원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를 시작으로 벼슬길에 나섰다. 홍문관 박사와 부수찬, 부교리 등을 역임했다. 중종 6년(1511)에는 엘리트 코스인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받았다. 외교관으로서도 능력을 발휘했다. 중종 7년(1512) 일본에서 붕중 등이 사신으로 왔을 때 선위사(宣慰使)였다. 붕중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줘 국경을 넘은 사귐을 맺었다.

 그의 활동시기는 대략 세 시기로 나뉜다. 제1기는 벼슬길에 나선 때로부터 중종 14년(1519) 기묘사화가 일어난 때까지이다. 2기는 중종 32년(1537)까지의 은거 기간. 3기는 재등용이 된 중종 32년부터 숨진 중종 38년(1543)까지. 1기에는 벼슬길이 순탄해서 홍문관 대제학에까지 올랐다. 기묘사화로 파직을 당해 경기도 이천의 주촌(注村)과 여주의 이호(梨湖)에 은거해서 강학에 힘썼다. 많은 제자를 길렀다. 김인후(金麟厚)와 유희춘(柳希春), 송인수(宋麟壽), 정운(鄭雲) 등이 대학자로 성장했다.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의 어버지 허엽(許曄)도 제자였다.

 생의 불꽃을 태운 마지막 기간인 중종 32년에 예조판서 겸 성균관사로 기용됐다. 대사헌과 병조판서를 거쳐 우찬성 겸 문형(文衡)을 지냈다. 그리고 좌찬성에 오른 뒤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 시기에 뒷날 인종이 되는 세자의 보도(輔導)에 힘썼다. 그런 연유로 인종의 묘정(廟廷)에 배향됐다. 여주 기천서원(沂川書院)과 이천 설봉서원(雪峰書院), 의성 빙계서원(氷溪書院) 등에 모셔졌다. 지은 책으로는 15권 7책의 '모재집(慕齋集)'이 있다. 

 

 

   
 

 울산의 경승을 읊은 다수의 시작품을 남겼다. 한시선집 '태화강에 배 띄우고'에 실려 있다. "삼산은 어렴풋이 눈 앞에 펼쳐 있고/ 신선들 피리소리 구름가에 내리는 듯./ 훌쩍 소리 없이 바람타고 떠나가/ 인간만사 헌신짝처럼 벗어던지고 싶어라.[어풍대(御風臺)]"

 

 

    "저 포말 속에 누가 살아 남을 수 있을까/ 상전벽해 몇 번인지 말할 수도 없구나./ 하늘 끝 수평선에 설렘은 끝 없으니/ 오직 친구와 한 잔 술이 있을 뿐.// 취한 눈 들고서 망망대해 바라보니/ 내 몸은 나도 몰래 허공에 떠있구나./ 동쪽 끝 서쪽 끝, 알아서 무엇하랴/ 대장부 발자취는 본디 정처 없는 것을.[개운포에서 바다를 바라보며(開雲浦望海有感)]".

 태화루에 올라 시를 지었다. '태화루에서 표경중 시의 운을 따라(泰和樓次表敬仲韻)'는 "만경창파 저 바다는 값을 매기지 못하겠고/ 파란 조릿대는 더욱 더 기이하네./ 이 풍경을 어찌 시 한 수로 갚겠는가?/ 시인을 재촉하여 백 수를 지어라 해야겠네."라고 읊었다. 또 "강풍은 넘실대고 비는 반이나 개었는데/ 동풍에 돛 달고 목란주에 올랐네./ 가녀린 노래가락은 구름 속에 퍼지고/ 놀라 깬 원앙은 먼 섬에서 노니네."라는 내용의 '태화루 유람선(書泰和樓船)'이란 시도 남겼다. 울산과의 각별한 인연을 알게 하는 시편들이다.

 평생 현실을 직시하며 실천적인 삶을 살다간 김안국. 만고(萬古)에 이을 그의 말씀이 오늘 우리의 가슴에 메아리로 남았다. "한 집안의 번영은 자녀의 교육으로 보장된다. 빈부귀천과 자질을 따질 것 없이 모든 사람에게 교육은 필수적이다. 소질에 따라 무슨 직업이든 가르치면 한 집안의 생계는 확보되지만, 부유한 집과 벼슬 높은 집도 교육을 소홀히 하면 망한다. 금보다 책을 상속함이 낫고, 기름진 논밭보다 작은 재주가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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