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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2년 1월 13일 군사정부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하고 27일 각령 제403호에 의해 울산을 특정공업지구로 결정, 공포한 뒤 2월 3일 지금의 남구 장생포동 납도마을(현재 효성 울산공장 동쪽언덕)에서 역사적인 울산공업센터 기공식을 거행했다. 사진은 기공식 발파 모습.

1962년은 산업화기반이 거의 불모상태였던 우리나라가 고도산업화 시대를 향해 첫 발을 내딛는 해였으며, 그 중심에 울산이 있었다. 당시 울산은 인구 3만명의 조용하고 아름다운 농어촌. 그러나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구심점이 되면서 울산은 우리나라 최고의 공업도시로 발돋움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박정희 정권 경제개발5개년계획 발표
1962년 2월 3일 '울산공업센터' 기공
기후·부지·교통 등 최적의 입지조건
3차 기간내 車·조선·석유화학 뿌리


#울산공업센터 기획 과정
울산공업센터는 어떻게, 그리고 누구에 의해 기획됐을까.
 먼저 울산이 대규모 공업도시로서의 최적의 입지조건을 갖췄다는게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울산은 지명에서 나타나고 있는 바와 같이 산으로 둘러 쌓여 있다. 6.25 전쟁때도 전장에서 예외가 됐을 만큼 대규모 공단이 들어서기에 안전하다는 뜻이다. 남북 20km, 동서 15km에 이르는 해안평야를 이루고 있고 수심이 깊고 조수간만의 차가 전국에서 가장 적은 항구를 갖고 있다.


 그리고 청천일수, 일조시간, 폭풍일수, 적설일수 등 기후조건도 다른 지역에 비해 유리하다. 특히 도시계획 총면적 176.04㎢의 15%인 26.5㎢가 공장입지의 적지로 판단되는 등 공장의 입지를 위한 넓고 평탄한 부지도 준비돼 있는 도시였다.
 태화강, 동천강, 외황강, 회야간 등 4개의 강과 지류가 흐르고 있고, 강우량의 계절적 편차가 적어 비교적 쉽게 공업용수를 확보할 수 있고, 해상교통과 육상교통이 접하는 수송교차지점에 위치한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이는 대량화물을 값싸고 안정하게 수송할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는 뜻으로 중화학공업에 더없이 유리한 지역이다.


   
▲ 정주영 현대창업자(오른쪽)가 기공식장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가운데), 태완선 전 국무총리에게 조선소 현장을 설명하고 있다.
 이 같은 지리적 조건으로 일제시대에 이미 정유공장을 옮기는 등 공단으로 조성할 계획이 세워졌던 곳이 바로 울산이다. 6.25 전쟁 때는 유엔군의 유류보급기지가 울산에 자리잡기도 했다.
 5.16 군사정변 이후 무엇인가 가시적인 성과를 빨리 국민에게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감을 갖고 있던 박정희 군사정권에게도 울산은 기회의 땅이었을 것이다.


 결국 박정희 대통령은 1962년 1월 2일 부산해운대에서 기업인들을 만나 대규모 공업단지 건설계획을 토의하는 과정에서 울산을 최종 확정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울산공업센터 확정을 위한 이 같은 과정에서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 울산을 공단최적지로 추천하는 한편, 당시 정보부 경제담당 고문이던 고 김용태 무임소 장관이 기업인들을 만나고 다니면서 울산 공단건설에 협력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밖에 울산출신으로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을 지낸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도 공업센터가 울산에 유치되는데 노력한 일인으로 손꼽히고 있다.
 
# 공업센터 기공식
정부는 1962년 1월 13일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한 뒤, 1월 27일 울산을 특정공업지구로 결정·공포한다. 그리고 1주일 뒤인 2월 3일 공업센터 기공식을 거행하게 된다.
 기공식 당일 오후 1시 15분 울산읍에서 7㎞ 떨어진 울산군 대현면 매암리.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을 비롯한 최고 회각 분위장 및 재경위원 전원, 송요찬 내각 수반을 비롯한 정부 각료, 샹바루 주한 외교단장을 비롯한 각국 외교사절과 국내 기업인 등 200여명의 내빈이 참석했다. 그리고 기공식에 참석하는 울산 주민들을 위해 장생포~울산사이에 놓인 녹슨철로에도 임시열차가 쉬지 않고 운행됐다 한다. 이렇게 모인 참석자들이 대략 3만명에 달한다고 하니 당시 울산 인구 전체가 기공식에 참석했다 할 수 있다.


 "사천 년 빈곤의 역사를 씻고 민족숙원의 부귀를 마련하기 위하여 우리는 이곳 울산을 찾아 여기에 신공업 도시를 건설하기로 했습니다. 루르의 기적을 초월하고 신라의 영성을 재현하려는 이 민족적 욕구를 이곳 울산에서 재현하려는 것이니 이것은 민족 재흥의 터전을 닦는 것이고 국가 백년대계의 보고를 마련하는 것이며 자손만대의 번영을 약속하는 민족적 궐기인 것입니다. 제2차 산업의 우렁찬 건설의 수레소리가 동해를 진동하고 공업생산의 검은 연기가 대기 속에 뻗어나가는 그날엔 국가 민족의 희망과 발전이 눈앞에 도래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빈곤에 허덕이는 겨레 여러분 5·16혁명의 진의는 어떤 정권에 대한 야욕이나 정체의 변조에도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으며 오로지 이 겨레로부터 빈곤을 구축하고 자손만대를 위한 영원한 민족적 번영과 복지를 마련할 경제재건을 성취하여야 되겠다는 숭고한 사명감에서 궐기했던 것입니다. 이 울산 공업도시의 건설이야말로 혁명정부의 총력을 다할 상징적 웅도이며 그 성패는 민족 빈부의 판가름이 될 것이니 온 국민은 새로운 각성과 분발 그리고 협동으로써 이 세기적 과업의 성공적 완수를 위하여 분기 노력해 주시기 바라마지 않습니다"


   
▲ 박정희 전 대통령, 송요찬 내각수반, 김유택 경제기획원장관, 샹바르 주한외교사절단장(왼쪽부터)이 시삽을 하고 있다.
 기공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이 같은 치사문을 낭독한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이후 정부는 울산공업센터 건설사업에 엄청난 투자를 했다. 1차 기간인 1962년부터 1966년까지 울산공업센터 건설사업에 투자한 액수는 453억1,600만원으로 이는 우리나라 총 투자액의 10.7%에 이른다. 1964년 5월 울산정유공장이 준공되는 등 막대한 투자인 만큼 발전속도도 빨랐다.


 2차 5개년 계획(1967~1971년)이 시작되자 영남화학과 한국비료공업이 가동을 시작했고, 동양나일론, 현대자동차 등이 차례로 준공했다. 1969년에는 석유화학공업단지 부지가 완성되자 한양화학을 시작으로 대한유화, 선경화섬, 이수화학 등이 속속 들어섰다. 지금의 현대중공업(당시 울산조선소)는 3차 5개년계획(1972년~1976) 기간인 1972년 3월 23일 착공했다. 이 기간동안 선경화섬, 한남화학, 진양화학 등 14개 공장이 준공됐고 코오롱유화 등 8개 공장이 착공됐다.


 이 처럼 울산은 3차 경제개발 기간 내에 지금의 울산 경제의 세 축인 석유화학과 자동차, 조선업종이 들어섰다. 1차 기간에 에너지와 비료 업종이 입주해 당시 빈약한 국가경제의 밑바탕 역할을 했다. 2차 기간에는 석유화학과 자동차, 그리고 3차 기간에는 조선 업종이 뿌리를 내려 울산이 세계적인 공업도시로서의 기반을 만들었다. 김락현기자 rh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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