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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산지역 이주민인 (왼쪽부터)박경문 온산읍 이장협의회 회장, 황홍근 온산망향비 설립추진위 사무국장이 돌당산 꼭대기 정자에 올라 고향마을을 떠올리고 있다.

 1980년대 초부터 수백명 통증·마비 증상
한국 최초 공해병…법적 피해 인정받기도
정부 1,200억 투입 1만 3천여명 전원이주
갈등·반목의 시간 잊고 관계개선 노력중

▲ 온산 이주민 망향비.
#온산병

온산 19개 마을의 주민들은 1975년부터 공단 배후지역인 덕신으로 이주를 시작했다. 공단부지에 포함된 주민들부터 이주가 이뤄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규모는 점점 늘어만 갔다.

    공장 인근 지역 주민들의 이주가 1987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기 때문이다. 이후 약 5년 동안 1만3,000여명이라는 사상 유례가 없는 집단이주가 이뤄진 것은 '온산병'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온산병은 온산국가산업단지 일대에서 발생한 공해병으로, 1983년 농작물과 양식어장 피해로 시작돼 사람에게까지 발병함으로써 '우리 나라 공해병의 고향', '한국 공해문제의 대명사'로까지 불린 대표적인 공해병으로 1985년 세상에 알려졌다.

 온산공단은 1974년 구리·아연·알루미늄 등 비철금속공업 기지로 지정된 후 1980년대 들어 화학·제지·자동차부품 등 다양한 업종의 공장들이 입주해 종합단지로 탈바꿈했다. 그러나 공업단지 개발을 위한 종합계획도 세우지 않고 개별공장들이 공장을 세우는 바람에 주민 대부분이 공단에 포위되거나 고립된 채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1983년부터 주민들의 허리와 팔다리 등 전신이 쑤시고 아픈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2년 뒤인 1985년에는 이 지역 주민 1,000여명이 전신마비 증상을 보이자, 한국공해문제연구소가 '이타이이타이병의 초기 증세와 비슷한 병'이라고 발표하면서 세간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았다. 같은 해 12월 온산지역 주민들은 11개 공해배출업체를 대상으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해 인체 피해 위자료, 농작물 피해보상금 지급 판결을 받음으로써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공해피해에 대한 법원의 구체적인 인정을 받기도 했다.
 

▲ 1974년 4월부터 온산산업기지 개발로 사라진 10개 법정리 19개 행정마을 주민들의 애절한 향수와 고향을 그리는 염원을 담아 놓은 유래비.
#이주 그리고 미스터리

이후 정부 당국도 공해피해를 인정하고 주민들의 집단이주를 결정했지만 현재까지도 이 온산병의 구체적인 원인은 규명되지 않고 있다. 일종의 미스터리극이 된 것이다.

 한 지역에서 수백 명이 비슷한 증세를 앓는다면 이는 보통 일이 아니었다. 공해병이 아니라면 집단 발병의 다른 원인을 찾아내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하지만 환경청은 당시 10일간의 역학조사를 한 후 "공해병의 가능성을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고 발표했다. 이후 상상을 초월하는 대책이 나왔다. 1985년 10월 4일 발표된 '울산·온산공단 주민 이주 대책'이 그것이다. 부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환경보전위원회에서 의결된 이 대책은 총 1,200억여원의 예산을 들여 공단 내 주민 전원을 이주시킨다는 내용이었다.

 1만3,000여명에 가까운 주민 이주는 가히 '세계적 사건'이다. '이유 없이' 수만 명의 엑소더스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그것도 국가 1년 예산이 12조원 규모이던 시절에 1,200억원에 가까운 혈세를 투입해가면서 말이다. 이것이 공해병이 아니라면 정부는 원인을 밝힐 때까지 환자들을 분산시키지 말았어야 했다는 것이 환경단체의 주장이다.  원인을 밝히기는 커녕 이주함으로써 증거까지 없애는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민들은 병의 원인을 밝히는 것 보다는 숨막히는 곳을 하루라도 빨리 떠나고 싶어 했다. 정부는 이 같은 주민들의 요구를 받아주면서 정작 '온산병'으로 대두되는 공해문제에 대해서는 입을 닫았다. 이주민들 중 최고령들이 모여 있는 덕신지역 곳곳의 경로당에서 만난 어르신들은 온산병에 대해 언급하려 들지 않았다. 한마디씩 던진 말에는 자조가 섞여 있었다.

 "온산병, 간단히 말하면 그건 환경단체와 주민들이 만들어 낸 병이라 할 수 있지. 바닷가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피부병 등 질병이 많았어. 하지만 분명한 건 공장이 들어서면서 그런 일반적인 질병의 정도가 심각했지. 당시 주민들은 공해가 심해 이주를 간절하게 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환경단체와 더불어 온산병을 더 부풀리는 수법을 썼던게 사실이야. 결국 정부의 이주대책 발표가 나왔지. 하지만 그 때 철저한 원인규명을 하지 않은 것은 분명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네."
 
▲ 온산산업기지 개발로 고향을 잃고 인근 덕신지역 등으로 뿔뿔이 흝어졌다. 울주군 온산읍 덕신리 신온2리 경로당에서 만난 이주민들.
#화합

이주민들이 굳이 '온산병'에 대해 언급하고 싶지 않은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온산공단이 들어선지 이미 반세기에 들어섰고, 앞으로의 반세기가 더 중요하다는 의미다.

 사실 온산공단이 들어서면서 공단과 주민들은 갈등과 반목으로 시간을 보내왔다. 주민들 입장에선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공해속에 살아야 했던 시간들이 한 없이 야속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업의 목적이 단순 이윤추구에서 이윤의 환원이 접목되면서 공단 인근 지역과의 관계도 개선되고 있다.
 지역의 한 주민은 "현재의 온산은 다른 지역과는 태동 그 자체가 다르다"며 "공단과 배후도시의 관계, 이제는 그럴듯한 겉모양이 아닌 진정으로 아껴주고 배려하는 화합의 관계로 발전해야 한다"고 말했다.  글=박송근기자 song@ 사진=유은경기자 usy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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