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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슬길에 밀려 긴 세월 보냈지만 임진왜란때 선비 의병장으로 순절

 

   
제봉 고경명 선생

"근자에 국운이 불길하여 섬 오랑캐가 불시에 침입했다. 처음에는 우리 나라와 약속한 맹세를 저버리더니, 나중에는 통째로 집어삼킬 야망을 품었다. 우리의 국방이 튼튼하지 못한 틈을 타서 기어들어 하늘도 무서워하지 않고 거침없이 북상하고 있다. --중략(中略)--

소생은 비록 늙은 선비이지만, 나라에 바치려는 일편단심만은 그대로 남아 있어 밤중에 닭의 소리를 듣고는 번민을 이기지 못하여 중류에 뜬 배의 노를 치면서 스스로 의로운 절개를 지키려 한다. 한갓 나라를 위하려는 성의만 품었을 뿐, 힘이 너무나 보잘 것 없음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이제 의병을 규합하여 곧장 서울로 진군하려 한다. --중략(中略)--

아! 각 고을 수령들과 백성, 군인들이여! 어찌 나라를 잊어버리랴. 마땅히 목숨을 저버릴 것이다. 혹은 무기를 제공하고, 혹은 군량으로 도와주며, 혹은 말을 달려 선봉에 나서고, 혹은 쟁기를 버리고 논밭에서 떨쳐 일어서라! 힘 닿는대로 모두 다 정의를 위해 나선다면 우리 나라를 위험에서 구해 낼 것인바, 나는 그대들과 함께 있는 힘을 다할 것이다."

임진왜란 때 금산전투에서 순절한 고경명(高敬命)의 그 유명한 '마상격문(馬上檄文)'의 한 부분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두 달 뒤 6월 11일 고경명은 60세의 노구를 이끌고 전남 담양에서 창의했다. 6월 24일 북상길에 오르면서 말 위에서 각계각층에 보내는 격문을 썼다.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열혈남아들이 그의 휘하에 몰렸다. 후대에 최치원의 '황소격문(黃巢檄文)'이나 제갈량의 '출사표(出師表)'에 비견되는 명문으로 꼽혔다.

 고경명은 6,000여 의병과 함께 7월 10일의 금산전투에서 순절했다. "나라를 위해 한 번 죽을 따름이다"라면서 장렬하게 최후를 맞았던 것. 둘째 아들 인후(因厚)도 함께 순국했다. 그의 평생 좌우명처럼 나라를 구하는 데에 한 몸을 불사랐다. '세독충정(世篤忠貞)'. '나라에 충성하고 오로지 독실하게 살아 절개를 지켜야 한다'. 그의 절의와 기개를 나타내는 서슬 푸른 말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했다.

 

   
제봉 고경명 선생 동상.

 

#중앙 관직서 31세 울산군수로 좌천
고경명은 20세에 진사시에 장원하고, 26세에 문과에 갑과의 장원으로 뽑혔다. 화려한 벼슬길이 열렸다. 신진 관료로서 촉망을 받았다. 호사다마일까. 명종 18년(1563년) 31세에 불미스런 사건에 연루되면서 벼슬길에서 곤두박질쳤다. 울산군수로 좌천됐다. 중앙 관직에서 남쪽 바닷가 울산으로 떠나는 그의 마음은 참담했다.

 김순거(金舜擧)라는 친구에게 띄운 시에 심사가 잘 드러나 있다. "부친을 이별하고 도성을 떠나는 마음 어떠하리/ 영남 외딴 성 길은 만리가 넘는데/ 바다 기운 스며들어 푸른 풀에 독으로 물들고/ 남쪽 이내 속에 자라 시내의 물고기도 나쁘다./ 벼슬하고 은거하는 신세는 애강남부(哀江南賦)처럼 서글프고/ 풍토는 월절서(越絶書)와 비슷하구나./ 다만 평생 충성스럽고 신실한 섬김 보전한다면/ 은혜의 물결 있으니 거처하는 곳마다 편안한 집되리라.(癸亥冬自弘文校理左授蔚山郡示金舜擧)"

 울산에서 쓴 시에 애닯은 마음이 드러나 있다. 울산시가 펴낸 한시집 '태화강에 배 띄우고(송수환 번역)'에 실려 있다. "시월에 조령(鳥嶺)을 넘어오니/ 외로운 울산 고을, 바다는 끝이 없네./ 뜨락 가지엔 마지막 한 잎 달렸는데/ 담장 아래 국화는 이제야 피고 있네./ 성곽 밖에는 어부들 사는 집/ 대나무 숲속에는 아전들 사는 집./ 어느 때나 낙동강 거슬러 올라가서/ 조그만 돛단배에 바람 품고 떠갈까.[울산에 내려오니(有感)]"

 "내사 늙어서 못 떠나지만/ 갈매기는 가벼워도 돌아오지 않는구나./ 사람이 되어서 새만도 못하니/ 머리 돌려 어떤 모습 지을까.// 바닷가엔 무심한 갈매기/ 하늘 끝엔 밥만 찾는 이 늙은이./ 너와 내가 겨루는 건 백발 뿐이려니/ 함께 청탁(淸濁)을 논하기는 어렵겠구나.[갈매기(見白鷗有感)" 그러나 울산군수에서 곧 파직돼 귀향했다.

 

 

   
정기록

 

#어머니도 아내도 울산김씨
고경명은 조선 중종 28년(1533년)에 대사간을 지낸 아버지 맹영(孟英)과 어머니 울산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60세에 의병장으로 나서 그해 7월 금산전투에서 전사했다.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이순(而順). 호는 제봉(霽峰) 또는 태헌(苔軒). 시호는 충렬(忠烈).

 명종 7년(1552년) 20세에 진사시험에 제일인으로 합격하고, 이듬해 울산김씨와 혼인했다. 슬하에 장남 종후(從厚)를 비롯한 여섯 아들과 딸 둘을 두었다. 명종 13년(1558년) 26세에 문과에 장원급제했다. 성균관 전적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2기로 나뉘는 첫 벼슬길에 들어섰다.

 사가독서를 거쳐 29세에 홍문관에 들어갔다. 명종의 부름을 받아 연회에 참석하고, 62폭 병풍에 제시(題詩)하는 영예도 누렸다. 옥당에 있으면서 시작(詩作)으로 명종의 총애를 받았다. 사헌부 지평, 홍문관 부수찬과 부교리 등을 거쳐 홍문관 교리에 올랐다. 벼슬길에 나선 뒤 5년여간 거침없이 내달렸다.

 31세 때인 명종 18년(1563년)에 불미스러운 사건에 연루돼 홍문관 교리에서 울산군수로 좌천됐다. 크나 큰 불명예였다. 울산군수에서도 곧 파직돼 귀향했다. 19년간의 은거생활에 들어갔다. 정자 면앙정을 짓고 호남가단을 이끌고 있던 송순(宋純)을 찾아 가르침을 받았다. 광주목사 임훈과 함께 무등산을 유람하고 '유서석록(遊瑞石錄)'을 지었다.

 선조 14년(1581년) 49세에 영암(靈巖)군수로 다시 벼슬길에 나갔다. 두 번째 출사길에 오른 것. 서산군수와 한성부윤, 종부시 첨정 등을 거쳐 선조 23년(1590년)에 동래부사로 부임했다. 다음해에 정철이 파직되자, 그의 추천을 받았다는 이유로 파직돼 귀향했다. 이 때 이달(李達), 양대박(梁大撲) 등과 교유했다.

 

 

   
유사석록

 

#금산전투서 아들과 함께 장렬히 산화
선조 25년(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월에 장남 종후와 차남 인후를 데리고 김천일, 유팽로 등과 함께 담양에서 창의하고 의병장이 됐다. 6월 초에 출사표를 지어 조정에 올리자 선조가 공조참의에 제수하고 초토사를 겸하게 했다. 7월 10일 금산전투에서 아들 인후를 포함한 6천여 의병과 장렬히 산화했다.

 큰아들 종후는 시와 글씨, 그림에 뛰어나 호남의 5대 시인으로 불렸다. 아버지와 동생이 전사하자 "불행한 때를 맞아 집안에 화변이 망극하다. 불초는 초토에 누워 이 왜적들과 함께 한 하늘을 이고 살아 있는 것이 참을 수가 없다"라는 격문을 돌리면서 의병을 모아 진주로 달려 갔다. 진주성이 함락되자 김천일, 최경회와 함께 남강에 몸을 던져 순절했다.

 고경명의 둘째 딸도 정유재란 때 왜적을 꾸짖으며 칼을 안고 엎드려 순절했다. 고경명의 손자이자 종후의 아들 부립은 정묘호란 때 의병장이었다. 조선 말에는 후손 고광순이 60세에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으로 일본군과 싸우다 구례 연곡사 계곡에서 전사했다. 고경명의 우국충정이 대를 내려온 것.

 선조 임금은 임란이 끝난 뒤 1601년에 광주에 사우(祠宇)를 지어, 포충사(褒忠祠)라 사액하고 봄가을에 제사를 모시게 했다. 그가 태어난 마을에는 세금과 잡역을 면제해주는 특전을 베풀어 마을이름이 복촌(福村)으로 바뀌었다. 문집으로는 시문을 수록한 '제봉집(霽峰集)'과 무등산 기행문을 실은 '유서석록(遊瑞石錄)', 격문과 통문, 기문을 담은 '정기록(正氣錄)' 등이 있다.

 

 

   
제봉집

 

#성산 사선으로 유유자적의 삶
그는 빼어난 시인이었는데도, 후대에 의병장으로서의 명성에 가려져 있었다. 첫 벼슬길에서 물러나 19년간 산수에 파묻혀 살면서 오롯이 독서와 시 짓기에 열중했다. 송강(松江) 정철(鄭澈)과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 서하(棲霞) 김성원(金成遠)과 함께 '성산 사선(星山 四仙)'으로 불렸다.

 스승인 송순의 정자 '면앙정'의 승경 30곳을 묘사한 '면앙정 삼십영'을 김인후와 임억령, 박순과 함께 지었다. '추월산의 푸른 절벽'이란 '추월취벽(秋月翠壁)'은 "강철 같은 절벽 푸르게 솟아/ 층진 봉우리 하늘에 닿은 듯/ 가을 바람 옷깃 흔들 때/ 둥근 달 떠오르길 기다리네"라고 읊었다.

 그가 외적 현상과 내적 조응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시인임을 알 수 있는 '눈(詠雪)'이란 시를 보자. "더러움을 덮어 가리니 거대하고 미세함이 사라져/ 자연의 표리는 엄한 경계가 바르다./ 천상의 조화가 진정 영의 코끝 회칠 벗기듯 교묘하여/ 인간 세상의 아름다움이 비할 데가 없다. 놀란 거위 퍼덕이며 날아가 바람 부는 물가에 있고/ 달리던 개는 돌아와 달빛 비치는 처마 아래에 있다./ 삼면을 탁 트이게 경영하라 함을 다시 알겠네./ 고요히 사람 소리 없고 둥근 산봉우리만 드러나 있다."

 

#울산서 10여편의 시 남겨

그는 짧은 기간 울산군수로 있으면서 10여편의 시를 남겼다. 울산에까지 내려 온 마음을 드러낸 작품과 함께 시인으로서의 감수성을 엿볼 수 있는 시편이다. 한시집 '태화강에 배 띄우고'에 실려 있다.
 "짙푸른 숲 속에 한 송이 붉은 꽃/ 수줍은듯 고운 자태 이 늙은이를 비추네./ 가련타 저 모습 알아주는 이 없는데/ 험한 비 속에서 피고 또 졌구나.// 꾀꼬리는 숲 속 석류꽃 속에 노닐고/ 여름날 작은 마루는 맑고도 그윽하네./ 남풍이 건 듯 불어 연못에 비 내리니/ 주렴 걷으니 가을처럼 서늘한 오월이라네.[석류꽃(見榴花開有感]"

 "깊은 밤 촛불 앞에 홀로 앉아/ 장검 두드리며 시 읊어도 마음은 괴로워라./ 음습한 비 흩날려 먼 포구로 이었는데/ 울부짖는 파도는 성벽을 흔드네./ 울산에서 닷말짜리 벼슬하더니/ 머리에 가득한 백발 세월이 놀라워라./ 임금 은혜 갚으려 몸과 마음 다하지만/ 못 돌아가는 내 마음 늙은 아내는 알고 있으라.[홀로 새는 밤(夜坐)]"

 고경명은 비록 벼슬길에서 밀려나 긴 낙백의 세월을 보냈지만, 나라가 미증유의 환난에 처하자 분연히 일어섰다. 나라를 구하는 데에 초개처럼 목숨을 던졌다. 선비로서 시대적인 사명을 잊지 않았던 것. 시대를 뛰어 넘어 지도층이라면 본받아 할 일이 아닌가. '황백국(黃白菊)'이란 시가 웅변하고 있다. "본래 색으로는 황색을 귀히 여기고/ 천품은 백색을 아주 귀하게 여긴다./ 세상 사람들 관점이 비록 달라도/ 서리를 이기고 살아있는 가지는 같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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