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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구는 2009년 4월 25일을 '고래의 날'로 제정했다. 고래의 날을 기념해 열린 고래바다여행선 취항식에서 김두겸 남구청장, 최병국·김기현 국회의원 등 참석자들이 여행선에 승선해 손을 흔들고 있다.

울산과 고래는 결코 떼려야 뗄 수 없는 아주 오랜 인연을 갖고 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울산과 고래와의 인연은 선사시대로 거슬려 올라간다. 반구대 암각화(국보 제285호)에 새겨진 296점의 그림 가운데 58점이 고래그림이다. 고래잡이를 하는 그림도 나온다. 우리 나라의 고래역사가 울산에서 시작됐다. 인류로는 맨 처음 고래를 잡았다.

 그로부터 우리 나라의 고래잡이 역사는 시작됐지만, 오랜 기간 공식적으로 고래를 잡지 못했다. 왕조시대에는 고래잡이를 금지했기 때문이다. 어쩌다 죽은 고래가 해안에 밀려오면 관리들의 눈을 피해 몰래 식용 등으로 이용했지만, 관리들에게 발각이라도 되면 큰 곤욕을 치렀다. 산채로 표류해오는 고래가 있더라도 바다에 내보내 주게 마련이었다.

 그런 실정으로 우리 바다에서의 고래잡이는 외세에 의해 불 붙었다. 조선 말 1840년대 초에 미국과 프랑스, 독일, 영국 등이 동해에 진출해 고래잡이를 했다. 일본과 러시아가 뒤늦게 가세했다. 러시아는 1899년 조선 조정의 허가를 받아 우리 나라의 세 곳에 포경기지를 설치했다. 울산의 구정포(九井浦), 즉 장생포에도 포경기지가 들어섰다. 그 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일본에게 넘어갔다.

 그렇게 우리 바다의 고래잡이는 일본의 독차지가 됐다. 한말에서부터 36년간의 일제강점기까지 쭉 이어졌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고 우리 손으로 고래를 잡게 됐다. 장생포는 포경기지로 부활했다. 45년 9월에 일제의 포경업에 종사한 100여명이 모여 일본어업통제주식회사 조선종업원 자치위원회를 만들고, 포경준비에 들어갔다.

 그해 12월 김옥창(金玉昌)씨를 비롯한 6명의 대표단이 일본에 건너가 일본해양어업통제주식회사 측과 협상을 벌였다. 다음해 2월에 포경선 2척을 넘겨 받아 돌아왔다. 포경선 인수대금은 우리 측 포경선원의 퇴직금과 위로금, 그리고 김옥창씨의 사재로 충당했다. 그 포경선으로 고래잡이에 나서 광복 후 최초로 1946년 4월 16일에 범고래 1마리를 잡았다.

 그 날이 그해 9월 초에 설립된 조선포경주식회사에 의해 '한국포경기념일'로 정해졌다. 우리 나라 현대포경의 초석을 다진 김옥창씨는 1917년 전남 신안군에서 출생했다. 1937년 일본수산주식회사에 들어가 포경경력을 쌓았다. 2005년 5월 16일 향년 88세로 세상을 떴다. 우리 포경역사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분이다.

 국제포경위원회(IWC)의 결정에 따라 1986년부터 고래잡이가 전면 금지됐다. 장생포는 쇠락의 길을 걸었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고래가 문화관광자원으로서 경쟁력이 있다는 사실에 눈을 떴다. 장생포가 우리 나라 유일의 고래문화특구로 지정됐다. 울산 남구청은 고래문화관광자원의 인프라 구축에 나섰다. 고래에 대한 친화력을 갖도록 하기 위한 방안도 찾았다.

 남구청은 2009년 4월에 매년 4월 25일을 '고래의 날'로 제정했다. 그에 앞서 남구의회는 그해 4월 11일에 '4월 25일 고래의 날 제정 조례안'을 의결했다. 고래의 날을 4월 25일로 택한 이유는 매년 4월에 울산 앞 바다에 많은 고래가 출몰하고, 절기상 곡우가 지난 뒤에 고래잡이에 나서는 것을 감안한 것이라고 남구와 남구의회는 밝혔다. 고래의 날이 만들어져 울산은 옛 고래문화의 원형 보존에 나서는 등 고래문화 보급에 더욱 활기를 띠고 있다.

 한편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지만, 상당수 국제환경단체들이 2월 14일을 '고래의 날'로 정했다. 국제포경위원회(IWC)가 1982년의 총회에서 상업포경을 무기한 중단하기로 결의하고, 1986년부터 전 세계 바다에서 고래잡이를 금지했다. 그러나 바다오염과 유전개발, 불법포획 때문에 고래가 멸종위기에 처해 있다면서 2월 14일을 고래의 날로 정하고, 고래보호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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