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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는 누각을 지나 마당으로 들어가면 성철스님의 동상이 우뚝 서 있다.

# 생가 터에 세워진 절
스님의 생가는 의외의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한평생을 산 속 깊은 절에서 거처하며 속세와 연을 끊고 '참선의 길'을 고집했던 그였기에 생가 역시 그런 곳에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갑작스러운 만남이었다. 경남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 210번지를 향해 달리고 있는 길에서 '아직 한참 더 가야 도착하겠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저만치 '겁외사(성철스님 생가)'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애초부터 스님의 생가는 산 중턱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접었어야 했다. 신은 세계와 일맥상통한다는 성철스님의 가르침이 생각지도 못한 곳에 있는 생가의 위치를 뒷받침 해줬다. 그렇다. 신이라고 꼭 신전에 있어야하는 것은 아니고, 도를 닦는다 해서 산 속 깊은 곳에서 수행해야 함은 아니다. 정진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에 달려있는 것이다. '겁외사'라는 이름에 맞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공간답다.
 

   
▲ 겁외사 입구에 걸려있는 성철스님의 생전 모습.
# 무소유 실천 발걸음 잦아
차분하게 마음을 가다듬고 입구로 들어섰다. 그런데 입구가 또 한 번 방문객을 놀라게 한다. 보통 사찰에는 '일주문(사찰에 들어서는 첫 번째 문)'이 있기 마련인데, 겁외사에는 18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는 누각이 일주문 역할을 하고 있다. '지리산겁외사(智異山劫外寺)'라는 현판이 큼지막하게 달려 있는 걸로 보아 분명 성철스님의 생가는 맞다.

 누각을 따라 들어서니 눈에 들어오는 것은 커다란 스님의 동상. 스님의 생가임을 증명한다.
 마침 성철스님의 가르침을 따라 겁외사를 찾은 관광객들이 여럿 있었다. 여름휴가를 맞아 성철스님의 '무소유' 정신을 몸소 체험하러 왔단다. 뒤를 돌아보니 성철스님 동상을 향해 다소곳이 불공을 드리는 어머님이 보였다. '아!' 하고 아무생각 없이 들어왔다는 것이 부끄러워지는 순간. 기자는 어머님을 따라서 공손히 손을 모아 기도를 드렸다.

 동상 앞 양 옆에는 염주와 목탁 조형물이 스님을 지키고 있다. 성철스님이 생전에 쓰시던 염주와 목탁을 재현한 것이다. 시야를 낮춰 염주 사이로 성철스님을 바라보았더니 더욱 아득하게만 보인다. 기자가 아주 어렸을 때 타계하신 분이니 결코 가깝게 만은 느껴지지 않았다. 성철스님의 진짜 모습을 알려면 천천히 생가를 더 둘러봐야 할 것 같다.
 
# 스님 일대기 그려진 대웅전 벽화
스님의 동상 왼편에는 석가모니를 모신다는 곳인 대웅전이 있었다.
 겁외사 대웅전은 특히 일반 사찰들에 비해 화려한 색채를 자랑했다. 2001년 3월에 창건 됐다고 하는데, 지어진지 얼마 안 돼서 일까. 붉고 푸름이 명확하게 구분되는 원색과 금속 문창살이 눈부시다. 한편으로는 '무소유'를 강조하는 성철스님의 뜻과 맞지 않다는 생각도 든다.

 대웅전 외벽에는 부처님의 일생이 아닌 성철스님의 일대기가 그림으로 표현 돼 있다. 동양화가 김호석 씨가 직접 그린 벽화라는데 스님의 출가에서부터 수행, 설법, 다비식 장면들이 차례로 새겨져 있다. 스님을 커다란 연꽃으로 감싸 다비식을 진행하는 엄중한 분위기가 절로 느껴진다. 스님의 일생을 한 눈에 알 수 있는 벽화를 보며 '우러러 봐야 할 분'이라는 생각이 어렴풋이 든다.

   
 
# 푸른 빛 잃지 않은 사리
마당에 세워진 스님의 동상 너머에는 성철스님이 출가하기 전까지 머물던 생가로 들어가는 입구 '혜근문'이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깔끔하게 정리된 기와집이 맞이한다.
 흔히들 스님의 생가는 초가집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당시 스님의 집안은 대대로 지리산 자락 인근에서 큰 부잣집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복원한 생가도 기와집으로 재현했다고.

 안채인 '율은고거'는 부친의 호에서 가져와 이름을 붙였다. 오른쪽에는 사랑채 '율은재'가 있는데 여기에는 성철스님 일가가 생전에 쓰던 가구와 책 등의 물건들로 채워졌다.
 스님의 유품전시관인 '포영당' 쪽으로 가다보면 스님이 생전 30년 동안 기거하시던 방 안을 재현 해 놓은 작은 전시관이 있다. 탁자위에 고스란히 놓여있는 안경과 펜 등을 보고 있자니 마치 스님이 자리에 앉아 불경을 읽고 있는 듯하다.

 한 발짝 더 나아가 신발을 벗고 성철스님의 유품을 전시하고 있는 포영당에 들어갔다.
 스님이 항상 입고 다녔다던 '누더기 두루마기'가 눈에 띤다. 몇 번을 누볐는지 군데군데 각기 다른 회색 옷감들이 헤져있다. 때 묻은 검정고무신도 스님의 중도사상을 오롯이 보여줬다.
 한켠에는 스님의 유년 이야기를 담은 장문의 게시물이 걸려있었다.

 어머니가 스님을 가지고 나서는 문 밖 출입을 삼가고, 모난 음식을 먹지 않고, 모난 데 앉지 않는 등 온갖 정성으로 태교했다는 이야기부터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당에서 중국의 역사서 자치통감을 배우고 나서 더 이상 다른 사람에게 배우지 않고도 학문의 깊은 이치를 깨달았다는 어린 시절 이야기까지. 스님의 남다른 어린 시절을 알 수 있는 글이다.

 스님의 행적을 나타내는 사찰 지도와 젊은 시절 읽은 책, 필기류, 노트 등을 찬찬히 관람하다 발걸음을 멈췄다. 스님이 돌아가시고 남긴 '사리' 때문이었다. 흔히 사리는 지극하게 불심을 닦은 승려에게만 나온다는 말이 있다. 그 도가 깊을수록 맑고 푸른빛을 나타낸다고 하는데, 동그란 구슬모양의 스님의 사리는 아래가 비쳐 보일 정도로 푸른빛을 감돌고 있다.
 
# "모든 진리는 자기속에 구비"
생가를 둘러보고 혜근문을 나서는 길, 스님의 동상 쪽으로 가지를 뻗어 올라가고 있는 소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나무도 스님의 깊은 불심을 공경하고 있는지 스님을 향한 소나무 가지 끝이 너무나도 간절하게 느껴진다.

 그러고 보면 겁외사 안의 모든 것들에는 스님의 모습이 담겨있다.
 영원한 대자유인이 되고자 했던 스님의 생애가 드러나는 절인 만큼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나무와 꽃들에도, 시민들의 염원과 소망이 담긴 조약돌 소원탑에도, 심지어 불공을 드리는 어머님의 모습에도 성철스님이 있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모든 진리는 자기 속에 구비 돼 있습니다'
 포영당에서 읽었던 성철스님이 남긴 법어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곱씹어 볼수록 가슴 한 구석에 있던 어두운 마음이 씻겨 내려간다. 
 청빈하고 무소유의 삶을 살았던 성철스님의 절, 겁외사의 하늘은 유난히 맑고 푸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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