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어느길에도 뒤지지 않는 울산만의 길
세계 어느길에도 뒤지지 않는 울산만의 길
  • 김정규
  • 2011.09.01 22:41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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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의재발견] 선사 문화길
   
▲ 한반도의 기원을 알 수 있는 반구대 암각화. 고래와 사슴, 표범등 150여종의 그림들이 체온처럼 따뜻하게 남아있다.

 

야윈 여름날. 날이 흐리다. 선사문화길을 가는 길목에서 소나기를 만난 것은 지난 주말이었다. 한쪽에선 구름이 몰려오고, 한쪽에선 파란 하늘이 열리는 오후였다. 반구대 암각화 주차장에서 차를 버렸다.
 늦여름 오후의 햇살은 야위었지만 이내 땀을 불러왔다. 암각화 박물관까지 오분남짓 걷는 동안 길 양쪽으로 여름숲이 절정이다. 숲을 보며 걷는 길목마다 울산의 역사 퀴즈판들이 곳곳에 서서 발목을 잡았다. 길가 개울과 앞서거니 뒷서거니 가다보니 암각화 박물관이다. 고래형상의 건축물이 한눈에 들어온다. 암각화 모형과 산사시대의 생활상들이 잘 정리해 놓은 국내 유일의 암각화 박물관이다. 1년의 절반이상이 물속에 잠겨 쉽게 그 모습을 볼 수 없는 반구대 암각화를 선명하게 복원해 놓아, 아이들 학습에 좋을 듯 했다. 고래 꼬리 부근 야외전시장에는 전세계의 이름난 암각화 복원품들이 자리잡았다. 들여다보노라면 실제 반구대 암각화만큼 정교하고 세밀한 바위그림은 없는 듯하다. 박물관을 나와 대곡천을 건너면 왼쪽으로 천전리 각석 가는 길과 오른쪽으로 반구대 암각화 가는 길로 갈라진다.

늦여름 완한 숲의 향기속으로 걷는다. 반구대 암각화에서 시작해 천전리 각석으로 이어지는 7㎞ 남짓의 선사문화길. 세계에 자랑할만한 한국의 보물이자, 한반도의 시원을 찾아가는 성스러운 울산의 길이다

 

   
▲ 반구대.

#포은과 겸재를 엿보는 반구대
키 큰 오래된 나무들을 따라 길은 가지런하고 정갈하다. 그 길 한 켠에 거대한 절벽이 있다. 고려 말 포은 정몽주가 언양에 귀향 왔을 때 그 절경에 취해 자주 들렀다는 반구대다. 수직으로 솟은 절벽 아래로 대곡천이 유유하다. 겸재 정선도 청하(지금의 포항)현감으로 부임 후 그 명성에 찾아와 일필휘지로 그려내 남아있다. 거칠 것 없는 그의 붓끝에서 살아 난 반구대는 반추상의 이미지를 지녔지만 그 맛은 진경산수화와 다름없다.
 반구대 아래 절벽에는 예전 많은 시인 묵객들이 다녀간 흔적이 글귀로 남아 눈밝은 이들을 잡는다. 반구대 아래쪽에 포은을 그리며 세운 유허비가 비각 안에 고요하게 서있다. 길 왼편으로 집청정이 도로에 대문을 맞대고 섰다.
 이 집은 예전 동국대 박물관조사단이 반구대 암각화를 발견할 때 그 결정적 단서를 제공한 최경환 선생의 집으로 현재, 그 아들인 최원석씨가 농촌체험마을 프로그램으로 운영 중이다. 집청정은 300여년전 최신기가 지은 정자로 예전 에는 대문이 대곡천 인접해 있었으나 도로 확장으로 5차례 대문을 안으로 옮기면서 지금의 기형적인 구조가 됐다.
 집청정을 지나면 반구서원이다. 포은과 회재 이언적, 한강 정구를 기리는 서원은 조선 숙종때 건립됐다. 낡은 대문의 거친 나무 결이 간단치 않은 지난 세월을 얘기한다.  반구서원을 지나면 한실마을가는 길과 암각화 가는 길로 나뉜다. 이곳이 거북이 엎드린 형상이라는 '반구'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지형적 특성을 가장 잘 알 수있는 곳이다. 거북의 머리가 불쑥 솟은 형상 앞으로 대곡천이 휘감아 돌아 사연호로 흘러든다. 대곡천은 여기서 확연히 그 폭을 확대한다. 천 옆으로 많은 물버들이 자리를 잡았다.
 작은 언덕을 하나 넘어 암각화 가는 길로 접어든다. 시누대가 줄지어선 대곡천변에 공룡들의 발자국들이 드문드문 하다.

#여전히 물에 잠긴 암각화
공룡발자국을 지나면서부터 길은 호젓함을 선사한다.
 황톳빛 포장이 길게 깔려진 길은 가끔 키 큰 버드나무들이 자리를 잡고 서서 눈을 시원하게 해준다. 오른쪽으로 한층 넓어진 대곡천이 흐르고, 왼쪽으로 소나무와 잡목들이 우거져 상쾌하다. 그 길 끝에 불현듯 환하게 열리면서  사연호 상류가 나타난다. 건너 갈 수 없는 물길을 사이에 두고 능선하나가 버티고 섰다.
 그 능선아래 바위에 6,000년전 한반도를 열었던 선사인들의 흔적이 남아있다. 바로 반구대 암각화(국보 285호)다. 암각화는 세밀한 삶의 기록이자 만선의 기원이었다. 고래의 형태와 포경의 방법, 그리고 당시의 목축과 생활상을 고스란히 옮겨 놓았다.
 바위그림은 한 시대에 그려진 것이 아니라 시간을 따라 덧붙여 새기고 갉아냈다. 그런 연유로 일부 그림들은 중첩돼있다. 암각화는 총 150여개 그림이 가로 8m 세로 2m 크기의 암면에 다양한 방법으로 남겼다. 선사인들이 살았던 시기의 삶을 엿보기에 충분한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그러나 암각화는 여전히 물속에만 존재하고 있었다. 사연호와 암각의 불행한 만남은 댐을 만들고나서부터였다. 댐에 물이 차면서 일년의 절반이상을 물속에서 보내야 하는 암각화의 치명적 훼손을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수천년이나 건재하게 생명력을 유지해온 암각화는 불과 수십년만에 감당 할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아직 암각화 수장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물문제의 볼모로 잡힌 꼴이다. 
 반구대 암각화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페인 알타미라 천장 벽화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없는 예술적 가치를 지녔다. 알타미라가 채색 벽화의 최고라면 반구대 암각화는 새김벽화의 최고다. 그러나 그들은 알타미라 동굴의 입장을 학술적 연구 외에는 엄격히 제한하고 그 복원 동굴 안에서 조차 촬영을 허락하지 않을만큼 완고하게 지킨다. 문득, 부끄럽다. 

   
▲ 선사시대 다산과 풍요의 기원이 다양한 문양으로 남아있는 천전리각석.

# 풍요와 자손 번영의 기원 각석
오던 길을 되짚어 천전리 각석(국보 147호)으로 향한다. 이제부터는 대곡천을 거슬러 간다. 왼편으로 대곡천을 끼고 길은 소리 없이 열린다. 나무들은 어깨를 견주며 시원한 그늘을 만든다. 바람이 대곡천을 따라 타고 내려온다. 계곡은 원래 바람의 길목이다. 땀을 식히기에 부족함이 없다. 매미 소리와 풀벌레 소리가 합창하는 여름 오후의 숲길은 청량해 산모퉁이를 돌아 쉽게 대곡천을 건넌다. 기도원 앞길을 거쳐 대곡천으로 내려서면 천전리 각석이 얌전하게 자리잡고 있다.
 엇비슷하게 앞으로 기울어진 바위벽면에 알 수 없는 다양한 무늬들과 글귀들이 보인다. 각석이 자리잡은 곳은 석가산 동쪽 가장 돌출된 부분이다. 그 앞을 대곡천이 휘감아 흐르고 맞은편은 꼭 맞춤의 모양으로 함몰돼있다. 이 돌출이 사람들로 하여금 남성의 상징성을 이끌어냈다. 그들은 이곳에 여성의 가장 중요한 부위를 묘사하면서 염원했다. 선사인들이 새긴 문양은 오랜 시간에 걸쳐 구상에서 추상으로 건너왔다. 동심원에서 긴 타원형으로, 그리고 사각형으로 바뀌었지만 다산과 풍요의 기원은 여전했을 것이다.
 남성의 상징성에 여성의 상징을 그려낸 그림 사이로, 이 일대가 신라 귀족들의 나들이나, 화랑들의 심신수련장소로 이용되면서 글귀들이 더해졌다. 그들의 간절한 염원 때문인지 수 천 년 전의 그림은 여전히 체온이 따뜻했다.
 천전리 각석은 동국대 박물관조사단이 1970년 12월 5일 인근 반고사지를 조사하다가 주민들의 제보를 받고 찾아가 확인한 산물이었다. 후일 이 일이 알려지면서 그 이듬해인 1971년 12월 25일 학술조사를 나온 조사단에게 제보해 발견된 것이 반구대 암각화였다. 딱 일 년 간격으로 세계적인 문화유산이 두 곳이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이다.

   
▲ 대곡박물관.

# 수몰된 삶의 한 단면 대곡박물관
각석을 나와 대곡박물관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숲은 있지만 머리위로 그늘을 드리우지 못한다. 길은 시멘트로 가지런하게 포장돼 10분 남짓이면 대곡박물관에 도착한다. 대곡박물관은 댐을 만들면서 두동,삼동 등 수몰지역의 문화재 발굴결과 출토된 유물을 전시하기위해 2009년 지었다.
 박물관은 작고 아담해 정겹다. 옆 마당에는 삼동 하잠리 유적과 당시의 도로 일부도 복원, 전시해 놓았다.
 7km 남짓의 선사문화길이 이렇게 끝이 났다. 세계적인 문화유산 두 곳을 보고 돌아서는 뿌듯하면서도 한편으론 씁쓸하다. 세계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는 예술적 가치가 그렇고.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한 유산의 현재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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