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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제상과 그 가족에 얽힌 이야기를 주제로 교육체험의 공간으로 구성된 치산서원과 박제상 기념관.
    유은경기자 usyek@ulsanpress.net

가을을 시샘하듯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더니 기분좋은 가을바람이 볼을 간지럽힌다. 청명한 하늘, 선선한 바람을 벗삼아 울주군 두동면 만화리로 향했다.
 그곳에는 울산의 대표적인 인물이자 충·의·효·열의 상징, 신라충신 박제상 유적지가 있다.
 박제상 유적지는 망부석과 은을암 그리고 치산서원 등 3개소에 걸쳐 조성된 곳을 말한다.
 원래 이들 유적은 효충사와 함께 1988년 경상남도기념물 제90호로 일괄지정됐었는데 1997년 울주군이 울산광역시에 편입되면서 울주군 내의 이들 유적지는 같은해 10월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1호로 다시 지정됐다.

#망부석과 은을암

치술령 정상, 하염없이 먼 곳을 바라보는 여인이 있다.
 "그대는 나를 다시 볼 기약을 하지마오."
 기약없는 이별을 말하고 왜국으로 떠난 님을 기다리던 그 여인은 하염없이 울다 이내 돌이 되어버렸다.

 짙은 그리움의 사연을 간직한 여인은 신라의 여인이다. 바로 박혁거세의 후손인 박제상의 아내 금교 김씨.
 그녀의 사연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듯 처연한 모습으로 치술령 정상 부근을 지키고 있는 망부석은 전국에 수 많은 망부석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에게 회자되고 있다.

 망부석 좌우에는 두 돌이 더 있는데 이는 큰 딸 아기와 막내딸 아경도 어머니를 따라 죽어 화석이 된 것이란다. 하지만 차녀 아영만은 "나마저 따라 죽으면 어미와 동생들을 누가 묻어주며 또 동생 문량을 누가 양육하랴"하고 죽지 않았다고 한다.
 부인의 몸은 망부석으로 그 자리에 굳었지만 넋은 자유로워졌다.
 부인의 넋은 치술조로 변해 박제상이 목숨을 잃은 곳으로 알려진 목도까지 날아가 남편의 넋을 맞아 신라로 돌아왔다고 한다.

 어느날 왕이 있는 마루에 새 한마리가 날아와 앉아 구슬픈 소리로 지저귀며 '목도의 넋을 맞아 고국에 돌아오니 뉘라서 그것을 알리요'라는 뜻을 글자를 쪼아 놓고 날아가자 왕이 이상히 여겨 뒤쫓아 가 보게 했더니 치술암 기슭의 바위 속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왕은 비로소 그 새가 박제상 부인의 넋임을 알고 그 바위를 은을암이라 하고, 그 바위 위에 영신사를 세워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척과리 국수봉에 있는 은을암은 절벽처럼 파른 산비탈을 앞에 안고 국수봉 꼭대기에 매달리듯 자리잡은 위치 자체가 신기한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다.
 산나무들이 빽빽히 들어선 외길을 따라 한참 들어가야 만날 수 있는데 가파른 층계를 올라 은을암에 올라서면 울창한 산새를 굽어볼 수 있다. 새가 숨어들었다는 유래 때문인지 울창한 숲에 새들의 지저귐이 유난하다.
 

#치산서원과 박제상 기념관

박제상과 부인, 그 딸들의 혼이 치술령에 서려있다면 그 아래에서는 직접 눈으로 보고 체험할 수 있는 곳이 있다.
 바로 치산서원과 박제상 기념관.

 치산서원의 전신은 박제상과 그 부인을 기리기 위해 세웠던 사당터로서 영조 21년(1745년)에 최초로 세워져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폐됐다. 이후 1993년 복원돼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치산서원 내에는 충렬공 박제상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충렬묘와 박제상의 부인 금교 김씨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신모사, 박제상의 장녀 아기와 삼녀 아경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쌍정려가 있다.
 아쉽게도 대부분은 일반시민들에게 공개되지 않고 있다.
 
 치산서원 바로 옆에 있는 박제상 기념관은 박제상과 그 가족에 얽힌 이야기를 주제로 충·의·효·열의 의미를 되새기는 교육 체험의 공간으로 구성됐다.
 지난 2008년 9월 개관한 박제상 기념관은 9,641㎡ 부지에 박제상 전시관과 울주문화관, 로비, 교육영상실 등으로 구성돼 있다.
 박제상 전시관에는 박제상의 일대기와 그의 가족 이야기가 담긴 삼국유사 등 각종 고서와 박제상 순절비 등이 전시돼 있다.

 또 박제상이 태자를 구하기 위해 배를 타고 일본으로 떠나는 장면을 재현하기 위해 밀랍으로 당시의 배 모형을 만들었고 박제상이 당시 일본까지 배를 타고 간 항로도 모형 바다에 표시됐다.
 체험코너에서는 삼국시대 복식 블록 맞추기, 신라시대 사신 찾기, 편지쓰기 등이 마련돼 있다.
 울주문화관에는 박제상이 살았던 4~5세기의 시장 풍경이 디오라마(배경 위에 모형을 설치한 것)로 연출되도록 했고 당시의 다양한 유물도 전시됐다. 로비에는 박제상과 부인의 부조와 언양현의 고지도 복제판 등이 벽면에 전시됐으며 교육영상실에서는 홍보영상물 상영과 예절교육, 다도교육 등이 이뤄질 수 있도록 했다.
 
#외국인들도 감탄하는 박제상의 충의

 "울산시민은 물론 최근에는 외국인들의 방문도 잇따르고 있어요. 외국인들에게도 박제상의 충의는 귀감이 되나봅니다."
 박제상 기념관이 들어선 이 후, 박제상 유적지는 찾는 이들의 발걸음이 더욱 잦아졌단다.

 치산서원과 박제상 기념관을 안내하고 있는 김청자 울산문화관광해설사는 "박제상 기념관이 개관한 직후 하루 200여명의 관람객이 다녀갈 정도로 관심이 높았다"면서 "지난 여름에도 방학을 맞아 가족단위는 물론 전국각지에서 관람객들이 몰려들었으며 외국인들도 울산에 오면 꼭 둘러보는 필수코스로 자리잡았다"고 말했다.

 이달들어서는 학교가 개학하면서 체험학습을 위한 코스로 유적지를 찾는 단체 관람객들이 줄을 잇고 있다고.
 김 해설사는 "박제상 유적지는 부담없이 역사 속 인물을 만날 수 있는 교육의 장은 물론 어른들도 울산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다시한번 되돌아 볼 수 있는 역사문화 체험의 장소다"면서 "앞으로 더욱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박제상과 그 가족에 대한 연구가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 새가 숨은 바위라는 '은을암'. 이 바위에는 신라 충신 박제상과 그 아내에 관한 전설이 있다.
▶신라충신 박제상은 누구.

박제상은 신라 19대 눌지왕 때 사람으로 고구려와 왜국에 볼모로 잡혀가 있던 눌지왕의 두 아우를 기지를 발휘해 구하고 순국한 충신이다. 박제상의 충절에 대해 숙종은 '신라 천년의 으뜸가는 충신이다'라고 했고 정조는 '도덕은 천추에 높고 정충은 만세에 걸친다'라고 극찬했으며 1,500여년이 지난 오늘날 까지도 많은 사람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또 박제상의 부인은 딸들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가 슬품과 그리움에 겨워 통곡하다가 죽어 치술령 산신모가 되니, 백성들은 부인의 절개를 기리기 위해 '치술령곡'이라는 노래를 지어 되새기고 있다. '치술령곡'은 신라 때 노래로 내용은 전하지 않고 <증보문헌비고>(1908년)에 그 유래만을 전하고 있다. 
    손유미기자 ym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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