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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을 오르는 것 같다. 대형고래 해체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고래 좌우에 긴 칼을 든 사람들이 해체작업을 도우고 있으며 온통 잔치 분위기에 포구가 들썩인다. (1967년)

우리 나라의 고래연구는 국민들의 고래에 대한 관심이 몹시도 뜨거운 것에 비하면 한참은 뒤지고 있다. 그동안 고래연구에만 전념하는 연구기관이 한 곳도 없었으며, 연구자 또한 극소수에 불과했다. 울산광역시가 지난 2006년 3월 남구 매암동에 고래연구소를 짓고, 국립수산과학원에 운영을 맡기므로서, 최초의 고래전문 연구기관이 생겼다.

 고래연구소의 연구인력이라야 소장을 포함해 4명 밖에 되지 않는다. 다른 수산분야 연구기관이나 대학의 고래 관련 연구인력 또한 정확한 숫자는 파악되고 있지 않지만, 얼마 되지 않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 턱없이 부족한 연구인력으로는 연구실적이 미비할 수 밖에 없고, 결과적으로 국제포경위원회(IWC)에서 우리 나라가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우리 나라의 고래 연구는 전찬일(全燦一) 전(前) 부경대학교(부산수산대학교의 후신) 명예교수로부터 비롯됐다. 1세대 고래연구가인 전찬일 선생은 1915년 8월 13일 평남 순천에서 태어났다. 평양고보와 도쿄수산대학 어로과를 졸업했다. 고래와 인연을 맺은 것은 대학 재학 중에 일본 포경기지에 실습을 나가면서부터였다. 대학을 졸업한 뒤 황해도청 수산계 지방기수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디뎠다. 그 뒤 옹진군청 용호도의 수산시험장 근무를 자원하면서 어청도에 포경기지를 두고 있던 일본인 수산회사에 다니며 다시 고래와 인연을 잇게 됐다.

 1945년 광복이 되고, 이듬해 1946년 9월 7일에 우리 나라 최초의 포경회사 '조선포경주식회사(朝鮮捕鯨株式會社)'가 설립되자 그도 조선포경에 참여했다. 그는 부산출장소 소장직을 맡아 2년여 남짓 재직하면서 조선포경의 정착에 온힘을 기울였다. 그 뒤 부산수산대학교 교수로 부임해 1980년 정년 때까지 뒤떨어진 수산분야의 후진양성에 힘썼다. 정년 퇴임 뒤에도 명예교수로 있으면서 1994년까지 수산동물과 포경과목을 강의하면서 우리 나라의 고래연구의 주춧돌을 놓았다. 1세대 고래연구가로 불리는 이유이다.

 그는 1962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극경(克鯨)에 대해 귀신고래란 우리 말 이름을 붙이는 등 한자말이나 일본말 투성이인 고래 이름을 순수 우리말로 바꿔 붙이는 데에 정성을 쏟았다. 흰수염고래는 대왕고래, 긴수염고래는 참고래, 이와시구지라는 보리고래, 샤치는 솔피, 돌고래는 곱시기란 이름을 붙였다.

 선생은 만년에 경기도 일산에 있는 자녀의 집에서 지내면서도 고래에 대한 애정의 끈을 놓지 않았다. 지병으로 지난해 9월 28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95세. 경기도 파주의 한 공원묘원에서 영면에 들어갔다. 네 아들 가운데 막내 아들이 국립수산과학원 연구관으로 수산분야 연구를 하며 선생의 뒤를 잇고 있다.

 전찬일 선생에 이어 고래연구에 나선 학자가 부경대학교 교수를 지낸 박구병(朴九秉) 선생이다. 1930년 7월 30일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지난 2006년 5월 31일 부산에서 별세했다. 향년 77세. 양산의 한 공원묘원에서 영면에 들어갔다.

 박구병 선생은 부산수산대학교 수산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조지아대학교 등을 거쳤다. 1959년에 모교인 부산수산대학교 교수로 부임해 30여년간 수산분야에 대한 연구와 후학양성에 전념했다. 특히 고래자원에 대한 학문적인 틀을 마련하고, 근대적인 수산경제 이론을 도입하는 데에 크게 이바지했다.

 '한국수산업사(韓國水産業史)'와 '수산경제론(水産經濟論)' 등 우리 나라 수산분야의 발자취를 확연히 알 수 있는 저서를 지었다. 특히 1987년 12월에는 각고의 노력 끝에 우리 나라의 포경역사를 한 눈에 알 수 있는 '한국포경사(韓國捕鯨史)'를 수산업협동조합의 지원으로 펴냈다. 1995년 8월에 부산의 출판사 '민족문화'에서 책 이름을 '한반도연해포경사(韓半島沿海捕鯨史)'로 고쳐 증보판을 냈다. 우리 나라는 물론 일본과 중국에까지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고래류의 연구에 있어서는 귀중한 책이다.

 우리의 고래연구는 아직도 허약하기만 하다. 연구실적이 밑바탕이 되지 않는다면 고래도시의 완성은 물론 고래문화 또한 제대로 꽃필 수 없다. 연구인력의 확충과 지원이 뒤따라야 한다. 고래연구소의 연구인력을 5명 더 충원해줄 것을 오래 전부터 요구하고 있는데도 그대로이다. 척박한 풍토를 무릅쓰고 고래연구에 매달려온 초창기 고래연구가들이 없었다면 우리의 고래연구는 어땠을까? 절망적이었을 것이다. 고래문화특구의 성공을 위해서라도 겉치레에 치중하기보다는 기본에 충실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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