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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따기 체험을 한 어린이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계절마다 갖가지 체험학습으로 동심을 마음껏 펼치기로 유명한 울주군 길천리 오산마을의 길천초등학교(교장 김영우). 지난 20일 60여명의 전교생이 알밤을 주우러 마을 뒷산을 올랐다. 예정된 시간보다 늦게 도착한 취재진은 먼저 교문을 나서고 있는 아이들의 뒤꽁무니를 따라갔다.

#배려하는 아이들
저기 앞에 한 무리의 학생들이 보였다. 무리 가운데에 있는 선생님은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끊임 없이 주변을 살폈고, 학생들은 그런 선생님의 시야에서 한순간도 벗어나지 않고 재잘거리며 뒤따랐다. 가을로 접어든 농촌 들녘을 가로지르는 아이들은 거위의 행렬처럼 예뻤다. 제일 늦게 출발한 1학년 학생 9명이었다.


 그렇게 1학년 꼬마들과 산을 함께 오르는 중 맨 뒤에서 손을 꼭 잡고 걷고 있는 아이 셋이 눈에 들어왔다.
 유진이와 연희, 그리고 혜원이다.


▲ 밀사리.
 유진이는 이번 2학기에 이 학교로 전학한 아이고, 아빠는 미국인이다. 하얀 얼굴에 초록 눈을 가진 유진이는 애초 도심지의 학교에 입학했으나 다른 아이들의 놀림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행동 하나하나가 몹시 조심스러웠다.


 그렇게 전학을 한 유진이를 연희가 옆에서 챙겼다. '혹여 넘어지지나 않을까?' 키가 좀 더 큰 연희는 마치 동생을 돌보듯 유진이들 대했다.


 그런데 참 놀라운 것은 연희가 바로 전날 이 학교로 전학을 한 사실이다. 연희는 지나치게 말 수가 적고, 눈을 잘 마주치지 못한다. 그래서 연희는 다른 아이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했다고 한다. 그랬던 연희가 전학 온 다음날 밤 줍기를 위한 산행에서 유진이를 챙기고 있는 것이 여간 기특하지 않았다.


 담임선생님인 김향숙(47) 교사는 "연희가 전학 오기 전 아이들에게 생각주머니가 조금 작은 친구가 오니까 함께 잘 지내라고 말했는데 유진이가 특히 연희를 잘 챙기더라"며 "그런 유진에게 고마움을 느꼈는지 연희가 오히려 먼저 전학 온 유진이를 더 챙기더라"고 말했다.


 이 학교에 입학했었던 혜원이는 말 수가 비교적 적은, 전학 온 두 친구가 외롭지 않게 지속적으로 말을 부쳐주고, 기분이 좋은지 가끔 노래도 불러주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끊임없이 '까르르' 웃었다.
 여덟 살 꼬마들은 그렇게, 너무도 자연스럽게 배려를 실천하고 있었다.
 

▲ 양파 수확.
#밤 까는 터프가이
학교를 출발한 지 40여분이 지나 목적지인 밤나무 숲에 다다랐다. 밤나무 숲에는 이미 누나와 오빠들이 놀이터마냥 여기저기서 큰소리를 치며 뛰어다녔다. 그래서인지 가까이에 있는 밤나무 아래에는 밤송이 껍질만 가득했다.


 1학년 아이들의 얼굴에 하나 둘 아쉬움이 담기자 담임선생님이 두 팔을 걷어붙였다. 오솔길 옆으로 손을 타지 않은 밤나무를 발견한 선생님은 가장 어린 아홉명의 아이들을 이끌고 수풀을 해치며 들어갔다.
 아이들은 경쟁하듯 탄성을 내질렀다. "여기에 밤 있어요" "우와 선생님 저도 찾았어요" "선생님, 제가 주운 거예요" "선생님, 여기도요"


 아이들 손에 들려진 비닐봉지가 금세 채워졌다. 선생님은 갑자기 바빠졌다. 밤송이의 가시 때문에 감히 엄두를 못 내는 아이들이 모두 선생님 앞으로 다가섰다.
 40대 중반의 여자 담임선생님은 작심한 듯 운동화끈을 질끈 동여맸다. 그러더니 한쪽 발로 밤송이를 단단히 밟고, 집게를 든 두 손으로 힘껏 밤송이를 눌러 껍질을 벗겨 냈다.


 아이들의 탄성은 더 높아졌다. "와~ 밤이 너무 탐스러워요" "와~신기하다. 여기는 네 개가 들었어요"
 한 시간 정도가 지나 선생님의 얼굴에 땀이 맺힐 즈음, 아이들도 밤 까기를 해보고 싶다고 아우성을 부렸다.


 고슴도치 같은 밤송이 껍질을 까기 위해 아이들은 얼마나 단단히 마음을 먹었는지 앙다문 입술이 예사롭지 않았다. 선생님과 똑같은 자세를 취했지만, 힘이 모자란 아이들의 모습은 어쩔 수 없이 엉거주춤했고, 밤 까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날 1학년에는 스타가 탄생했다. 다소 마른 체구의 태윤이가 제법 그럴듯하게 딱딱한 밤송이를 깠다.
 누군가가 높은음으로 "와~ 터프가이다"하고 소리를 쳤다. 오전에 실시한 독서골든벨에서 1등을 한 예원이의 목소리였다.


 신이 난 태윤이는 요령이 붙었는지 더욱 다부지게 밤송이를 깠다. 이날 1학년 친구들은 태윤이를 '터프가이'라 부르며 자랑스러워 했다.
 

▲ 감자꽃 관찰.
#자연학습
선생님이 준비한 천 가방 한가득 알밤을 주워담은 아이들의 목소리가 높아진 걸 보니 신이 났나 보다. 마을로 내려가는 발걸음도 씩씩했다.


 밤나무 숲까지 아이들은 두 개의 마을을 지나왔다. 학교가 있는 오산마을과 밤나무 숲 아래의 후리마을이다.


 두 개의 마을을 다시 가로질러 되돌아가는 길에 아이들은 정겨운 농촌 길가의 풍경에 눈길을 돌렸다. 밤 따는 생각만 하고 산에 오르던 때와는 달리 다소 마음에 여유가 생긴 것이다.


 멋스러운 돌담의 골목길을 걸으면서 아이들은 봉숭아꽃을 보았다. 주렁주렁 매달린 호박과 수세미도 보았고, 돌담을 타고 오르는 나팔꽃도 보았다. 돌담 위에서도 자라는 명아주도 보았다. 그리고 이름 모르는 수많은 들꽃들이 아이들을 반겼다.


 아이들은 모든 것을 신기해하며 특유의 질문 세례를 퍼부었으며, 선생님은 하나하나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웃음이 떠나지 않는 아이들은 정말 행복해 보였다.
 
#후기
취재 이튿날 학교에 김향숙 선생님에게 다시 연락했다. 주어온 밤이 궁금해서였다.
 김 선생님이 알려준 대로 학교 홈페이지 학급홈피를 보니 역시 행복해하는 아이들의 밝은 얼굴이 나타났다.


 밤 줍기 행사 이후 교실로 돌아온 선생님과 아이들은 알밤과 벌레 먹은 밤을 골라내고 잘 다듬었다. 그리고 토실토실한 알밤만을 골라 아이들이 집에 가져갈 수 있도록 했다.


 아이들은 산에서 벌레에 쏘이고, 가시에 찔려가며 직접 주어온 밤을 엄마, 아빠에게 자랑스럽게 내놓았으리라. 그리고 엄마, 아빠는 그런 자신의 분신이 너무 예뻐 뽀뽀 세례를 퍼부었을 것이리라.


▲ 생태숲이야기.
 이튿날, 아이들에게 나눠주고도 남은 밤은 충분했다. 최근 리모델링을 한 이 학교 교실에는 주방은 물론 각종 식기도 갖춰져 있다. 아이들이 직접 교실에서 밤을 삶았고, 반으로 자른 밤을 티스푼으로 맛나게 먹었다. 역시 아이들의 모습은 행복했다.


 그리고 아이들은 전날 체험행사를 주제로 시를 썼다. 선생님은 아이들이 쓴 시를 학급홈피에 첨부파일로 올려놓았다.


 짧고, 단순해 보이는 시였지만 아이들의 행복한 감정만은 충분히 전달되는 훌륭한 시였다.
 길천초등학교에는 최근 2년간 17명의 도시지역 아이들이 전학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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