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대한민국의 정치 세계는 항시 시끌벅적하다. 이는 좁은 시각에서만 바라본다면 단지 몇 개의 정책들을 가지고 시행하느니 마느니 하는 왈가왈부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넓은 시각에서는 새로운 정책의 시행이나 기존의 정책 방향 개선 등에 대한 주도권을 두고 목숨 걸다시피 하는 경매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국민들의 관심도 사뭇 뜨겁다. 그러나 얼마 전 있었던 10월 26일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여느 때 보다도 국민의 이목을 사로잡았음은 물론 그것이 가지는 의미로 말미암아 박원순의 서울시장 당선 이후에도 그 여파가 좀처럼 시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각종 언론사의 사설을 읽을 때면 나오는 그 의의들 중에는 새로운 선거 문화인 SNS를 이용한 온라인 세력의 중요성, 기존 여당의 정치 형태에 대한 젊은 층의 반란, 효과적인 네거티브 전략을 이용한 선거 주도권 확보 등으로 보고 있다.
 

필자가 보는 의의도 이러한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나무를 보는 것이 아닌 숲을 보는 관점에서 이번 보궐선거의 의미를 조명하고, 보통선거의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관점에서 아쉬웠던 점과 추후 기대되는 미래 대한민국의 선거를 꿰뚫어 보고자 한다.

이번 선거는 기존의 보수 정당인 한나라당과 진보를 대표하는 야당의 단순한 경쟁 구도에서 벗어났다는 것이 주목할 만하다. 특히 야당이 통합한 후 무소속인 박원순을 후보자로 내세운 것은, 투표 참여자들의 표를 분산시키지 않겠다는 야당의 속보이는 선거 전략으로 이해될 수 있다. 게다가 큰 틀은 보수와 진보의 경쟁 일지라도 다방면의 정당 경쟁 구조를 단순 여당 대 야당으로 만든 양방면의 경쟁 구도로 전락시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느껴진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다수의 후보자로 말미암아 표를 분산시켜 설령 가장 많은 표를 얻은 당선자가 전체 표의 기대치 이상도 되지 않는 일을 없게해 대중들에게 가장 지지받고 일을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후보자를 뽑히도록 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실제로 심리학자들이나 인지과학자들에 의하면 후보자가 둘이나 셋 이상의 다수일 때 투표 참여자들이 후보자의 공략을 꼼꼼히 읽고 비교한 후에 가장 합리적인 후보를 선정하는 수치는 절반을 조금 넘거나 그조차 되지 않는다고 한다. 또 다른 시각에서 보면 여럿의 후보자가 많은 표를 얻기 위하여 자신을 어필하고 실현 불가능할 수 있는 공략을 내세우는 것 등의 일이 일어나는 것도 방지된 것이기에 의미를 둔다.

선거의 결과에서 여러 언론의 사설은 집권당인 한나라당의 반성을 촉구하고 있다. 너무나도 당연하다. 2·30대의 표가 박원순에게 몰렸다는 것은 2008년 그들이 기대했던 5년 후 이상적인 미래 대한민국 청사진과 너무나도 달랐다. 공략들은 지켜지지 않았고, 대중들의 말을 듣지 않고 묵살하기 바빴으며 잘 사는 사람을 위한 정치를 하고 미국에게 좋은 정치를 해 왔다. 잘못한 사실들은 은밀히 감쳐져왔고 잘한 사실들은 떠벌리기 바빴다.

애당초 국가가 생긴 원인은 사회를 구성하는 개개인의 이익들이 상충될 때 모두에게 이롭고, 때론 도가 넘는 이기들에 대해선 엄중히 규제하고 개선하기 위함이 아닌가. 그렇게 탄생한 국가를 이끌어갈 대표 정당인 한나라당은 얼마 남지 않은 집권기간 만큼은 모두를 위한, 설령 그것이 보수라는 이데올로기에 양립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규탄 받지 않을 정치를 해야 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번에 당선된 박원순 서울 시장은 자신이 품었던 서민들을 위한 정책을 적절하게 그리고 반드시 시행하여야 한다. 또한 보궐선거에서 승리했긴 하지만 비율의 차이가 크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하여야 한다. 겸손한 마음과 서민들을 위해 투신하겠다는 투지로 오세훈 전 시장이 다 하지 못한 임기 동안 이로운 정책을 펴야 할 것이다.
※청운고 시사칼럼동아리 '필담' 투고 글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