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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에 천주교가 전해진 것은 18세기 말이었다. 언양에서 시작됐다. 우리 나라의 천주교의 초기 수용단계에서 서울로부터 멀리 떨어진 영남, 그것도 최남단인 언양지방이 천주교를 수용함으로서 언양은 천주교에서 주목받는 곳이 됐다.
 언양이 천주교를 수용하게 된 것은 향반(鄕班)인 창녕성씨(昌寧成氏) 집안과 향리였던 해주오씨(海州吳氏)와 경주김씨(慶州金氏), 고령신씨(高靈申氏) 집안의 사람이 한양 근처 근기(近畿)의 남인들과 교유하면서 그들로부터 천주교를 접하고 학문으로 받아들이면서 비롯됐다.
 창녕성씨 가운데 천주교를 처음 받아들인 이는 울산군수를 지낸 뒤 울산에 정착한 성자부(成自富)의 10세손 성처인(成處仁).


 언양의 첫 신자는 해주오씨 오한우(吳漢佑, 베드로)와 그의 6촌 매제 경주김씨 김교희(金喬喜, 프란치스코). 오한우는 서울에 드나들면서 권일신, 정약용 등과 교분을 맺었다. 천주교 교리에 대한 책을 얻어와 익히는 데에 힘썼다. 부친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치자 김교희에게 책을 맡겼고, 김교희도 자연스레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정조 14년(1790년) 3월 서울에서 세례를 받고, 언양 최초의 신자가 됐다. 고령신씨 가운데에는 신인표가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집안에서는 그 사실을 숨겼다.
 천주교에 대해 호의적이던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된서리를 맞았다. 언양의 천주교도 역시 마찬가지. 순조 즉위 이듬해에 일어난 신유박해(辛酉迫害)로 피바람이 몰아쳤다. 오한우는 순교했다. 오한우의 가족과 김교희를 비롯한 김교희의 가족 등은 간월산 불당골에 숨었다. 신자촌이 만들어졌고, 언양 최초의 신앙공동체를 이뤘다.


 그때 강이문(姜彛文)이 언양에 유배왔고, 그에 의해 탑곡에 신자촌이 만들어졌다. 강이문은 장기에 유배돼 있던 정약용으로부터 예(芮)씨란 청년을 소개받아 신자가 되게 했다. 예씨는 상선필에 신자촌을 만들었다. 간월산 불당골과 탑곡, 상선필 세 곳에 신자촌이 들어서게 됐다.
 순조 15년(1815년)의 을해박해(乙亥迫害)로 충청도와 경상도 등지에서 언양의 세 곳 신자촌으로 많은 신자가 피신왔고, 신자촌은 더욱 커졌다. 간월교우촌은 제법 규모를 갖췄다. 12년 뒤에 터진 정해박해(丁亥迫害)로 신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김교희의 가족도 경주 아화에 피신했고, 김교희는 결국 1834년에 죽었다.


 헌종 5년(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로 언양에서도 큰 혼란이 일어났다. 충청도와 경북 일원의 많은 신자들이 피난와 상북 배내골 죽림굴 등에 모여들었다.
 6년 뒤의 병인박해는 더욱 가혹했다. 간월교우촌은 완전 파괴됐다. 신자들은 언양의 다른 곳과 심지어 경북의 청도와 경산 등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허인백과 김종륜, 이양등 세 명은 울산 좌병영의 장대에서 처형됐다. 울산 장대의 3인 순교자. 1886년 프랑스와 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이 풀렸다. 2년 뒤 1888년에 언양에 본당 설립을 위한 기성회가 조직됐다.
 1926년 12월 5일 부산본당에서 분리돼 언양천주교회가 설립됐다. 이듬해 1927년 5월 25일 공소 16개를 가진 언양본당이 창설됐다. 1928년 5월 25일에는 본당 건물과 사제관 기공식을 가졌다.
 본당 건물 설계는 보드뱅 신부가 했다. 1932년 8월 준공했고, 4년 뒤 사제관이 지어지면서 1936년 10월 25일 축성식을 가졌다. 부산·경남의 유일한 석조 고딕 양식 교회 건축물이 탄생했다. 울산본당은 1956년 4월에 분립했다. 언양성당 건물과 사제관은 2004년 9월 4일 등록문화재 제103호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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