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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고모의 입원 소식을 듣고도 짬을 내지 못하다가 며칠 전 요양병원을 찾았다. 늦기는 했지만 고모는 질녀의 방문을 환한 웃음으로 반겨줄 것이라 상상하며 찾아간 병원, 간호사가 가리키는 환자를 먼빛으로 보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분은 내 고모가 아니었다. 고개를 젓는 나를 보던 간호사는 늘 있는 일인 듯 무표정하게 돌아가고 슬며시 다가가 침대에 붙은 차트를 확인해 보고도 나는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침대에 누운 깡말라 아이만한 체구로 변한 낯선 이분이 내 고모라니. 가슴 밑바닥에서 짜르르한 통증이 올라와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아흔 나이를 두어 해 넘기고도 소녀 같았던 고모가 한 반 년 흐르는 사이 연줄이 다 풀려나간 빈 얼레 같이 얼굴에도 몸에도 표정이 사라져 버렸다. - 나 왔수. 바싹 귀에 대고 외치는 나를 겨우 떠서 한 번 올려다보고는 감아버린 고모의 두 눈. 고모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재미있는 이야기도 하고 맛있는 간식도 먹으며 수다를 떨고 오리라던 며칠간의 상상은 상상으로 끝나버렸다. 손을 많이 잡아주라는 고모 막내며느리의 부탁대로 손만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간직해온 말은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바라만보는 눈 안으로 점점 짙어지는 아픔과 슬픔과 애잔함.

 어쩌면 고모는 지금 조용히 이 세상 왔을 때 만나고 정들였던 모든 것들과 마지막 정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아낌없이 나누었던 마음을 거두어들이고 있는지 모른다. 잠시 눈 뜬 사이 내게 이미 별사를 건넸는지도 모를 일이다. 복잡한 마음으로 고개를 드니 고모의 얼굴은 무표정이 아니라 생의 시간을 다 건너와 모든 것을 내려놓은 담담한 얼굴이었다.

 고모를 통해 내 이별의 순간을 보고 있다. 어떤 이들은 미리 쓰는 유서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며 생을 정리해 나간다고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혼자 떠나는 여행을 통해 그간 품어왔던 크고 작은 욕심과 애착을 조금씩 내려놓는 연습을 한다고도 하는데 어떤 마무리로 이 이별을 준비해 나가야 하는 것인지.

 이미 창밖은 봄이다. 영춘화가 전한 봄소식에 담 너머선 매화 향기가 발걸음을 붙잡는다. 이제 풀과 나무들이 저 빈 들 빈 허공에 꽃을 피우고 잎을 피우고 열매를 매달 것이다. 이 기적 같이 오는 봄은 언제나처럼 버릴 것은 버리고 남길 것은 남겨서 새로이 시작하고 있다.

 어디 봄뿐이랴, 모든 존재들이 잠깐의 생존을 위해 준비해온 수많은 흔적을 보지 않았던가. 우리가 그러했듯 고모의 아이들도 새싹이 되어 자라고 스러지고 할 것이다. 그런 봄에게 빈 들을 내주기 위해 지금 고모는 준비 중인 것이다.
 이별이 아픈가. 신동엽 시인의 시 '그 사람에게'가 떠오른다. 시어들이 모래알처럼 가슴에서 구른다.
 
아름다운
하늘 밑
너도야 왔다 가는구나

쓸쓸한 세상 세월
너도야 왔다 가는구나.

다시는 못 만날지라도 먼 훗날
무덤 속 누워 추억하자,

호젓한 산골길서 마주친
그날, 우리 왜
인사도 없이
지나쳤던가, 하고
(신동엽, '그 사람에게'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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