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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집 한옥에서는 사랑채에서 안채로 이어진 골목길이 종종 발견된다. 전북 정읍에 있는 김동수 가옥이 대표적 사례.


 널찍한 마당을 두고 굳이 바깥사랑채부터 안채까지 은밀한 골목으로 연결했다. 무슨 이유일까.


 명지대 건축학부 이상현 교수는 신간 '길들이는 건축 길들여진 인간'에서 건축물이 알고 보면 인간의 생활양식을 좌지우지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 된다고 분석했다. 김동수 가옥처럼 사랑채에서 안채로 이어진 골목길에는 남편과 아내가 따로 떨어져 생활하던 양반가 풍습이 스며들어 있다. 사랑채에 머물던 남편이 눈치받지 않고 안채 아내를 찾아가도록 으슥한 골목길을 만들어놨다는 것이다.


 또 크게 안주인이 사용하는 안채와 바깥 양반이 쓰는 사랑채, 하인들의 거처인 행랑채로 구분돼 있다. 행랑채에서 사랑채를 바라보는 하인의 시선은 사랑채 누마루(한층 높게 만든 마루)에 닿는다. 하인이 고개를 들지 않는 이상 주인의 발 정도만 바라볼 수 있다. 그러나 사랑채의 주인은 행랑채 하인의 모든 것을 굽어보면서 감시할 수 있다.


 특히 궁궐은 건축물로 신분 고하를 길들이던 대표적 공간으로 꼽힌다. 저자는 경복궁 서쪽에서 흘러들어와 남쪽 광화문 옆으로 빠져나가는 금천(禁川)에 주목했다. 금천에 풍수지리적 요소가 있긴 하겠지만 실질적으로는 왕과 신하의 심리적 거리를 조절하기 위한 장치였다는 게 저자의 해석. 세자와 왕의 공간 사이에는 금천이 없었지만 신하의 공간은 금천으로 구분했다는 설명이다. 근정전의 이중 월대(月臺), 사정전의 통문과 협문 등도 왕권을 강조한 건축적 장치로 꼽혔다.


 반대로 이 같은 건축의 길들임에 '반기'를 든 건축가도 잇따라 나왔다. 시대나 사회적 분위기로부터 인간이 해방돼야 한다고 보고 자유로운 디자인을 추구한 것. 독일을 대표하는 건축가 한스 샤로운은 베를린필하모닉 콘서트홀을 설계하면서 외관을 작고 낮아 보이게 만들었다. 내부 설계도 출입구와 로비를 여러 구역으로 나눴다.


 나치 시절 전체주의를 구현하느라 많은 관중이 질서정연하게 앉아 있도록 했던 공연장 설계에 반기를 든 것. 프랭크 게리가 지은 월트디즈니 콘서트홀도 마찬가지다. 외관을 자유 곡면으로 감싸 보는 이로 하여금 어떤 것도 연상하기 어렵게 한 점이 특징이다.


 이는 1992년 LA 폭동 이후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를 순화하겠다는 취지에서 '과거의 어떤 기억도 떠오르지 않는' 건축물로 지었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이처럼 다양한 건축물을 예로 들어 건축과 인간의 알듯 모를 듯한 힘겨루기 양상을 흥미진진하게 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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