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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한 모퉁이에 봄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온몸을 쫙 펼친 봄동은 햇살을 가볍게 받아 안고 있다. 뿌리를 하얗게 드러낸 냉이는 봄향을 물씬 풍긴다. 깨끗이 다듬어진 쪽파는 열과 오를 맞춰 가지런히 누워있다. 눈길이 소쿠리 안에 옹기종기 담겨있는 쑥에 머문다.

 며칠 전에는 봄동으로 겉절이를 해 먹었고 냉이는 데쳐서 나물로 무쳐 먹었다. 오늘은 쑥국을 끓여야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제법 소복하게 담겨 있는 쑥이 한 소쿠리에 오천 원이라고 한다. '너무 비싸다' 살까말까 망설이는 사이에 봉지에 담긴 쑥이 내 앞으로 쓱 밀려왔다. 이른 봄에 어린 쑥은 약이라고 하니 군말 하지 않고 값을 치른다. 햇살이 조금만 더 도타워지면 친구들과 쑥을 캐러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멸치 육수를 내고 된장을 연하게 푼 것에 조갯살을 널고 쑥국을 끓인다. 봄향이 집안 가득 퍼진다. 묵은 지를 꺼내어 손으로 쭉쭉 찢어놓고 밑반찬 두어 가지 내 놓은 소찬이지만 밥맛은 꿀처럼 달다. 봄을 먹은 몸이 가뿐해진다.

 언제부터인가 입맛이 바뀌어갔다. 잘 먹던 음식이 먹기 싫어지고 좀처럼 손대지 않던 음식에 손길이 자주 갔다. 어릴 때 잔칫날이면 삼색나물이 상에 빠짐없이 올랐다.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었다. 그런데 엄마는 신기할 정도로 맛나게 드셨다. 이제는 그 나물들을 골라서 찾게 되었다. 아이들은 그런 내가 신기할지도 모르겠다.

 한때는 햄버거나 치킨, 피자 같은 음식을 즐겨 먹었다. 시켜 먹는 음식이라 간편한데다 맛있기까지 했는데 이제는 싫어진다. 아직도 치킨 맛에 빠져 있는 막내 때문에 간혹 시켜 먹을 때가 있지만 한 조각도 겨우 들었다 만다. 막내에게 먹을 때마다 이게 그렇게 맛있냐고 물어보면 '치느님'을 모욕하지 말라며 눈을 흘긴다. 우스갯말이지만 청소년들에게 치킨은 '하느님'과 맞먹는 존재라고 한다.

 식욕도 소화력도 왕성한 아이들에게는 기름진 이런 음식들이 입맛을 잡아당기겠지만 칼로리만 높지 영양가는 별로인 허풍선이 음식이 아닌가. 그런데 지금은 막을 길이 없다. 나도 한때는 그 맛에 빠져서 양념 묻은 손가락을 쪽쪽 빨며 먹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확실히 입맛이 바뀌었다.

 연한 된장국에 들어간 부드러운 두부, 참기름 한 두 방울 떨어뜨려 조물조물 무친 산나물, 향긋한 송이버섯 구이, 맑은 국물의 흰 살 생선국, 소금 간 살짝 배인 콩나물무침 등 먹고 나면 속이 편안해진다. 어떤 음식을 먹는가에 따라 성격도 바뀐다고 한다. 동물성보다 식물성 음식을 섭취하는 사람이 대체로 유순한 편이라고 들었다. 순해지기 위해서라기보다 속이 편하니 이런 음식들을 찾게 된다. 나이 들면 자연과 가까워지고 봄에 봄나물이 먹고 싶은 것처럼 몸이 스스로 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혹독한 추위를 견디고 봄을 밀어올린 대지 위의 뭇 생명들에게 경외감마저 생긴다. 땅심을 먹고 자란 봄나물들을 먹으면 한 겨울 추위에 피돌기를 게을린 한 몸속의 핏줄들이 해빙된 강물처럼 손끝에서 발끝까지 피를 날라다 주는 것 같다. 겨우내 시들머들했던 몸에 맑은 기운이 퍼지는 것 같아서다.

 봄에는 봄을 먹고 여름이 되면 여름을, 또 가을을 먹게 될 것이다. 그 중에서 봄을 잘 먹어 두면 한 해를 무사히 견뎌낼 수 있는 힘이 생길 것 같다. 쑥국을 먹었으니 쌉싸래한 머위 잎으로 쌈을 싸먹고 두릅은 초고추장에 찍어 먹어봐야겠다. 초벌 부추나 유채나물 미나리도 빠질 수 없겠다. 달래간장을 만들어 밥에 넣고 슥슥 비벼 먹고 싶다.
 새봄을 먹고 올 한 해도 잘 살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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