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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제주 바다에서 불법 포획되어 돌고래 쇼에 동원되던 남방큰돌고래를 다시 바다로 돌려보내기로 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돌고래 네 마리 가운데 두 마리는 성산포항에 마련된 가두리에서 바다 적응 훈련을 받은 뒤 5,6월경에 방류될 예정이고, 건강 상태가 안 좋은 다른 두 마리는 서울대공원에서 위탁 관리를 받은 뒤 거취를 결정할 예정이란다. 신문에는 바다로 들어가는 돌고래의 사진이 실려 있었는데,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지 긴 입 끝이 살짝 올라간 것이 마치 고래가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자유와 위험이 공존하지만 원래 자신이 살아왔던 드넓은 바다로 돌아가게 되어 고래도 기쁜가 보다.

 나도 고래를 본 적이 있다. 벌써 20년 전인가. 설악산 가는 길에 속초 근처 바다에서, 바다를 가르며 튀어 오르는 수십 개의 물보라를 보았다. 돌고래 떼였다. 돌고래들은 물 밖으로 솟구쳤다 다시 자맥질해 들어가며 하얀 물결을 남기면서 제법 오랜 시간을 우리와 같이 북으로 향했다. 가볍게 몸을 솟구치며 즐거운 듯 뛰놀던 고래들. 지금도 생각하면 벅차고 뭉클한 장면이다. 그 후 아직까지 고래를 보지 못했다. 몇 해 전 고래 탐사선을 타고 제법 멀리까지 가보았지만 차가운 바닷바람만 가득 안고 돌아왔다. 고래는 바다와 육지를 통틀어 몸집이 가장 큰 동물이지만 그 커다란 몸을 쉬이 드러내진 않는가 보다.

 하긴 왜 그렇지 않겠는가. <나무를 심은 사람>으로 유명한 캐나다의 애니메이션 작가 프레데릭 백의 <위대한 강>은 세인트로렌스 강 하구의 바다생물들의 운명을 보여주는 애니메이션이다. 처음엔 바다코끼리, 대구, 고래가 들끓던 북미 바다의 풍요로운 모습이 나온다. (화면엔 '득시글 득시글'이란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많은 생명체들이 보인다.)

 하지만 화면은 이내 어두워지면서, 북미대륙에 유럽인들이 들어와 바다를 유린하고 생명들을 학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무수한 고래들이 고기와 기름을 공급하기 위해 작살에 맞아 죽어간다. 고래와 인간의 공존이 깨지는 순간이다.

 세네카 인디언의 전설에 의하면 원래 고래는 두 발 달린 짐승인 인간의 조상으로, 인간에게 지구의 역사와 바다의 이야기를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고래와 인간이 서로 소통을 하며 가르침을 전수 받는 관계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래는 인간의 조상이자 스승이자 동반자였다는 의미인데, 오랜 시간이 지난 오늘날에는 사냥꾼과 사냥감, 몰이꾼과 먹잇감, 심지어 구경꾼과 노리개의 관계로 상황이 역변하고 말았다. 그러니 아무리 고래가 몸집이 크다 해도 인간에게 쉽게 모습을 드러낼 리 없는 것이다.

 사실 고래처럼 덩치가 큰 생물들은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생존하기가 더 힘들다. 상아를 얻기 위해 남획된 탓도 있지만 먹잇감과 서식지를 구하기 어려워 절멸의 위기에 몰린 코끼리를 생각해보라. 물론 고래가 멸종 위기에 빠지자 관련국들은 1946년에 국제 포경규제 협약을 맺어 고래잡이를 제한하고 있고 1986년부터는 상업적인 고래잡이를 금지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도 아직까지 고래잡이가 허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고래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좀 더 세심한 노력과 주의가 필요하다.

 고래는 고기나 기름을 얻기 위한 유용성도 유용성이지만 그 존재가 주는 상징적인 의미도 크다. 거대한 생명체가 광활한 바다에서 뛰어논다는 이미지가 주는 원시성, 역동성, 자유, 청춘, 꿈과 같은. 사실 송창식의 노래 '고래사냥'이나  배창호 감독의 동명의 영화가 크게 인기를 끌었던 것도, 80년대 당시 암울했던 현실에서 벗어나 바다에서 뛰노는 고래와 같은 자유와 일탈을 꿈꾸던 젊은이들의 열망이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그러므로 더 많은 고래가 번식하고 회유하여 푸른 동해에서 헤엄치길 바란다.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가 넘쳐나는 바다는 상상만으로도 가슴 벅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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