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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시가 내년 4월 완공을 목표로 복원공사가 한창이 태화루의 조감도.

한창 복원공사가 진행 중인 태화루는 과거 울산의 랜드마크였다. 울산은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그렇고 미래 역시 태화강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태화강 상류가 바다와 맞닿은 시절부터 이 땅에 사람이 살았고 그들의 흔적이 바위그림으로 남아 있다는 것은 이 땅의 과거다. 그 과거의 물길이 흘러 태화강 언저리에 사람들이 모여살고 집단을 만들어 고대국가의 형태를 갖춰 나간 것은 반구대암각화의 바위그림이 인류사의 꼭짓점으로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 문화가 물길을 펼쳐 동해로 나가는 길목에 누각으로 꽃핀 것이 태화루다. 그 누각에 모여든 사람이 이 땅을 노래하고 그 노래가 메아리로 돌아 사람을 모이게 했다. 그 아득한 시절이 울산의 과거이자 오래된 역사다.
 
태화루는 신라 선덕여왕 12년(643년) 자장율사가 중구 태화동 황모산 아래 반탕골에 지은 태화사의 서남쪽 벼랑에 세워진 문루를 겸한 종루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여말에 왜구의 노략질로 절집은 사라졌으나 문루는 살아 남아 관아에 의해 누관(樓觀)으로서 구실을 했다. 조선 때 그곳을 다녀간 서거정(徐居正)이 한양에 돌아간 뒤에 현판을 보내와 더욱 명성을 얻었다.
 
임진왜란 때 태화루가 불탄 것이 정설(定說)로 돼있지만, 각종 읍지류를 살펴보면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임란 다섯 해 전 선조 20년(1587년) 경에 오랜 풍파로 시달렸는데도 관리를 제대로 받지 못해 자연적으로 허물어졌다. 태화루 편액과 제영(題詠) 현판은 유림(儒林) 한 사람이 보관한 것으로 추정했다. 태화루는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임란이 끝나고 현종 때 울산 유림들이 관청에 건의해서 재건된 객사 종루에 그동안 보관돼 오던 서거정이 쓴 태화루 현판을 달고, 원래 태화루의 정서를 회상하면서 새 누관(樓觀)으로 삼았다. 원래 태화루의 이름을 꾸며댔다고 해서 '모칭(冒稱) 태화루'라고 불렸다.
 
조선시대 영남루, 촉석루와 함께 '영남 3루'로 꼽히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탄 태화루(太和樓)복원의 역사가 한창이다.
 
울산 사람들에게 큰 자랑이었던 태화루는 2014년이면 위용을 드러낼 전망이다. 중구 태화동 구 로얄예식장 일대에 복원하는 태화루는 울산대학교 도시건축연구소의 용역결과에 따라 단일누각이 아닌 복합역사공원으로 조성된다고 한다. 울산시는 특히 역사기록을 바탕으로 '태화루(太和樓)' 현판이 걸린 누각과 홍교(나무다리), 사직단(社稷壇), 기우제단은 물론 누각 앞 태화강에 나루와 놀잇배를 띄우고 옛 시인묵객들이 태화루의 아름다운 절경을 읊었던 시비도 세울 계획이라니 기대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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