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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이 대한민국을 이끌 고 있는 산업수도가 됐지만 그 연원은 오래됐다. 이미 1,000년 전 울산은 신라의 국제무역항으로 멀리 로마부터 아랍과 중국을 잇는 국제항로의 출발지이자 종찾지였다. 그 증거가 바로 계변성이다.
 

 현재의 중구 반구동과 학성동 일대는 신라말의 개지변(皆知邊) 또는 계변성(戒邊城)이라 부르던 곳인데 나말려초에 박윤웅(朴允雄)이라는 호족이 나타나 고려 태조 13년(930년)에 하곡(河曲), 동진(東津), 우풍(虞風)의 임관(臨關), 동안(東安)의 두군을 합하여 흥례부(興禮府)로 올려 그 치소(治所)를 두었던 울산의 중심지였던 곳이며, 조선조 후기까지도 울산에서는 가장 인구가 조밀하였던 곳이다.
 

 지리적으로 보면, 세종실록지리지 울산군 조에 병영성을 일러 바다 어귀로부터 3리 떨어졌다 하였으니 공설운동장이 있는 정지말들(井之末野)이나 관상들은 물론 마단들(三山平野) 및 왕생이들(王生野)이 모두 신라말이나 고려 때는 바다였던 것이다.
 계변성은 신라시대를 대표하는 무역항이었다. 또 통일신라 말기부터 고려 초에 걸쳐서는 울산 최대 세력판도를 떨쳤던 흥려부(興麗府)의 중심이었다.
 

 계변성은 지금의 어딜까. 학자에 따라 학성공원 또는 충의사 뒷산을 꼽기도 한다. 일부 학자들은 중구 반구동 서원마을(동부동)을 계변성 자리로 본다. 1991년에 발굴된 토성의 유물들이 그 근거다. 이 지점에 해발 25m 높이로 솟아있는 작은 바위산이 계변성터이자 고려 초의 흥려부 관아가 있었던 곳이다.
 이 일대는 지금은 육지가 되었지만 신라시대 때만 해도 동천강과 약사천, 그리고 태화강이 합류하여 형성된 넓은 포구였다. 이 때문에 울산만을 거쳐 경주로 들어가는 물자를 감시하고, 무역선이 정박하기 좋은 해상 교통의 요충이었고, 울산 해상세력의 오랜 거점이었다.
 

 계변성이 역사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박윤웅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록에는 '박윤웅이 신라 말기에 학을 타고 신두산(神頭山)에 내려온 신학성(神鶴城) 장군인데, 나중에 계변천신으로 받들어져서 울산 고을의 성황신이 된 인물'로 묘사돼 있다.
 그는 울산 박씨(=흥려 박씨)의 중시조로 경순왕 4년(930년)에 고려 태조에게 항복한 뒤 고려의 후삼국 통일에 큰 공을 세웠다고 전한다.
 그 공로로 고려 태조는 임관현(모화), 하곡현(굴화), 동안현(서생), 우풍현(웅촌), 동진현(강동)을 합쳐서 흥려부로 승격시켰다. 흥려부는 울산 역사상 가장 넓은행정구역을 가졌던 시기이다.이 때가 고려 태조 23년(940년)이니 지금부터 1067년 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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