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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현대자동차가 들어서 있는 염포만은 부산포(富山浦:釜山鎭)·내이포(乃而浦:鎭海市 熊川洞)와 더불어 3포(浦)를 이루어 일본에 개방한 국제무역항이었다. 1418년(태종 18)에 개설되어 왜관(倭館)을 두어 도박왜인(到泊倭人)을 머물게 하고, 염포에 상륙하여 서울로 올라가는 왜인은 언양(彦陽)·경주·안동 등을 거쳐 가도록 정하여 염포는 좌로(左路)의 시발지가 되었다.
 

 신라 때는 하곡현(河曲縣), 고려 때는 지울주군사(知蔚州郡事), 조선시대에는 울산군(蔚山郡)의 관할 하에 있었으며, 진(鎭)이 설치돼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울산군 방어진읍 염포리로 되었다가, 1962년 울산시 염포동으로 편입되었다.
 지명 유래는 예로부터 소금밭이 많아 '소금나는 갯가'라 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지형상으로는 서북쪽에 하안평야가 있을 뿐 갯가와 산지로 둘러싸여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염포진(鹽浦鎭)이 있어 수군만호가 주둔하였다. 문헌상에는 이곳에 성이 있어 둘레가 1,039척이 되고 성내에는 우물이 3개 있다고 하였다.
 삼포의 개항 당시 염포의 왜인의 수를 60명으로 한정했는데, 1510년(중종 5) 삼포왜란이 일어날 당시에는 120여 명이 상주하였다. 1512년 임신약조의 체결로 염포의 왜관은 폐쇄되었다.
 

 염포는 역사적으로 울산 지역을 방어하는 군사기지로서 큰 몫을 하였다. 태화강(太和江) 하구에 위치하여 개운포(開運浦)·유포(柳浦)와 함께 울산의 좌병영을 지키는 수군의 군사기지였다.
 이 때문에 이곳에는 수군만호진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곳에 수군만호진(水軍萬戶鎭)을 두게된 것은 태종 17년 6월 갑진(甲辰)부터였다. 그후 세종 8년 4월 무진(戊辰)에는 수군도만호진(水軍都萬戶鎭)으로 대체하였다가, 세종 8년 11월 기해(己亥)에 다시 만호진을 두게 되었다.
 

   중종 5년의 삼포왜란이 일어나자 염포에 있었던 왜관도 폐쇄되어 왜에 대한 대비도 불필요하게 되어 중종 17년과 39년의 진관(鎭管)의 개편 때 염포의 만호진을 폐지하고 말았다. 염포성의 위치는 성내마을과 중리마을의 경계를 따라 중리 뒷편 산복을 거쳐 옛 해안을 따라 축조하였다. 그러므로 중리마을이 성안에 들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은 성터를 거의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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