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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은 신라가 해양대국을 이끄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무역항이었다. 이 때문에 왜구의 침략도 잦았다. 이러한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울산은 해안 방어선으로서의 역할이 중요했다. 관문성은 이같은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기 위해 왜적의 침입으로부터 경주를 보호하는 목적으로 쌓은 산성이다.
 

 신라 성덕왕 21년(722)에 쌓은 이 산성의 원래 이름은 모벌군성(毛伐郡城)·모벌관문(毛伐關門)이었는데 조선시대에 관문성으로 부르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박천이라는 냇물을 사이에 두고 동해를 향하여 쌓았으며, 673년에 쌓은 북형산성과 함께 경주의 동쪽을 지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관문성은 경주의 다른 산성들과 다르게 산과 산을 연결하며 길게 쌓은 특수한 방식의 산성으로, 그 규모가 12㎞에 달해 신라의 만리장성으로 불리기도 했다. 성 안에는 성문자리로 보이는 곳과 창고자리·건물자리 등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772년 10월에 모벌군(毛伐郡)에 성을 축조하여 왜적의 길목을 막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당시 이곳이 신라(新羅)의 모화군(毛火郡)이었으므로 바로 이때가 관문성을 축조한 초축연대이다.
 

 한편, 9세기 초에는 문화관문(蚊火關門)으로도 기록되었고,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각간(角干) 원진(元眞)이 3만 9,262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쌓았는데, 길이가 6,792보 5척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성은 경주시와 울산광역시 경계의 삼태봉의 남측에 있는 둘레 1.8km의 기박산성(旗朴山城)에서 서쪽으로 모화리와 녹동리의 문을 거쳐 서쪽의 치술령 남쪽에 걸쳐 있으며, 석벽은 가로 40∼50㎝, 세로 20∼30㎝의 잘 다듬은 돌과 자연석을 이용하여 우박천(牛朴川)을 사이에 두고 양편 높은 산에 동해를 향해서 쌓았다.
 

 성내에는 문터 5개소와 수구 3개소, 건물지 5개소 및 우물과 연못이 각각 1개씩이 남아 있다. 관문성은 신라의 도성 외곽의 산성을 이용한 방위 체제에 다시 그 외곽의 방어를 위하여 구축된 것으로, 남쪽 지역 행성의 특수한 자료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성은 663년에 축조된 부산성(富山城)과 673년 9월에 축조한 북형산성(北兄山城)과 함께 경주 평야의 동쪽, 즉 경주에 들어올 수 있는 가장 좋은 지역인 영일만과 울산만에 상륙하는 왜적을 방어하는 데 큰 구실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반월성(半月城)의 주위가 1,023보인데 반하여 관문성의 길이는 6,792보 5척으로 그 규모가 커서 후세 사람들은 신라의 만리 장성이라고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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