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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혜숙

흙담의 아랫도리를 휘감는 넝쿨,
한때는 어머니의 유두에서 가랑가랑 냇물 소리 흐르고
일바지 대못에 걸려 망초꽃 피우던 폐가에 들어서면
울울창창하던 아버지의 노랫소리 간 곳 없고
꽃 물든 문풍지며 잔솔가지 활활 타던 아궁이는
거미줄의 내력 같아서, 눈에 화석이 박힌다
아이들이 빠져나간 문틈 사이로 왕거미가 꿈틀,
지네 발등처럼 늘어진 나뭇가지가 울울하다
녹이 번진 창엔 흉흉한 잡풀 걷어 낸 초승달이 걸리고
지붕 없는 숲 위를 역류하던 울음,
떠도는 깃털의 잔영들,
허공을 맴돌다, 흩어진다
동족이 겨눈 할아버지의 죽음이
내 몸의 폐허를 더듬거리면
나쁜 피를 다 쏟아낸 유령처럼
구겨진 사진 속에서 빠져 나오는 어둠, 어둠들
시간의 껍질을 베낀 파릇한 잔디가 시리다


■ 폐가는 슬픔의 역사다. 내 몸 또한 구석구석 폐허다. 대립과 반목, 이념의 허상들을 벗겨내고 신성한 터를 지켜야 한다. 그것은 우리들의 몫이다. 훼손되고 상처로 얼룩진 척박한 땅에서 피어나는 넝쿨, 그리고 잔디의 생명력! 그것은 어머니의 한이기도 하고 소외되고 아픈 사람들의 희망 같은 것이기도 하다. 평화의 땅에서 잃어버렸던 꿈이 회귀되길 기원해 본다. ※약력 - 서울 출생. 2009년 <정신과표현>으로 등단. 엔솔로지 <할퀸 데를 또 할퀴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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