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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990년 422점의 청동기 유물이 출토돼 사적 제332호로 지정된 검단리유적. 최근 산업단지 조성 계획으로 훼손이 우려됐으나 주민들의 반발로 원형 그대로 보전이 가능해졌다. 사진은1990년 유적 발굴당시의 모습이며 지금은 흙으로 덮혀 표지판만 남아있다. 울산신문 자료사진

원시의 울산은 어떤 모습이며 어던 사람들이 살았을까. 이 부분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해 주는 울산의 유적지는 생각보다 많다. 반구대암각화와 천전리 각석 일대가 그렇고 황성동과 언양 일대 고인돌 유적지가 그렇다. 그 중에서도 검단리 유적은 압권이다. 인공적으로 파여진 도랑으로 둘러싸인 청동기시대 대단위 마을 유적이 바로 검단리 유적이다. 검단리는 해발 200m 정도의 구릉 상에 위치하고 있어 청동기시대 마을 유적으로는 비교적 높은 곳에 위치한다고 할 수 있으며 주변에서 가장 높아 전 지역을 잘 조망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유적에서는 움집 약 100여 채가 조사되었다. 총 길이가 298m에 달하는 도랑이 마을을 타원형으로 둘러싸고 있다. 도랑의 폭은 넓은 곳이 118m, 좁은 곳이 70m 정도에 이르며 내부 면적은 5974㎡이다. 남쪽과 북쪽에 각각 입구가 1개소씩 설치되어 있다. 도랑의 단면은 V자 또는 U자형으로 깊이는 약 1.5m, 폭 약 2m 정도이다. 이 마을 유적의 형성 시기는 도랑의 설치 시기를 기준으로 도랑 설치 앞 시기(1기), 도랑 설치 시기(2기), 도랑 폐기 뒷 시기(3기)의 3단계로 크게 구분되어 마을의 변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1기에 속하는 집자리는 26채가 확인되었는데 중·소형 집자리가 많고 마을의 규모도 작다. 도랑과 겹쳐진 집자리는 대부분이 불에 타 폐기되어 도랑 설치와 관계된 것으로 보인다. 토기로는 깊은바리가 많이 사용되었는데 그중 구멍무늬를 가진 토기가 많다.
 
2기에 속하는 집자리는 17채가 확인되었는데 집자리의 규모가 앞 단계에 비해 커지는 특징을 보인다. 평면 방형의 집자리는 기둥 구멍이 4개인 것과 6개인 것으로 정형화된다. 특히 도랑 안쪽과 바깥쪽에서 집자리들이 발견되어 계층별로 주거 영역이 달랐을 가능성도 있다. 이 시기에 외부의 침입에 대비한 본격적인 방어 시설로서 도랑을 설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토기는 구멍무늬토기가 줄어들고 단사선문토기가 많아지며 붉은간토기와 손잡이토기의 출토량도 증가한다.
 
3기에 속하는 집자리는 37채가 확인되었는데 집자리가 많아지고 취락의 범위도 확대된다. 도랑은 폐기되고 정상부와 경사면의 2개 군으로 주거 영역이 구분된다. 대형과 소형 움집간의 격차가 심해지고 기둥 배치가 정연하지 않은 집자리가 많아진다. 토기는 구멍무늬토기가 보이지 않고 단사선문, 단횡선문이 새겨진 토기가 많아진다.
 
석기로는 곡식을 수확할 때 사용한 반달돌칼과 돌화살촉 등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확인된 완전한 도랑이 둘러진 마을 유적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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